“전쟁에 대한 공포로 공황장애가 왔습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에 콜라 2병과 와플 3조각으로 버텼습니다.”
24일(현지 시간) 새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가족 4명을 데리고 수도 키예프를 탈출한 김도순 씨(58·무역업)의 이야기다. 피란길에 오른 김 씨 가족 5명은 이후 52시간 동안 700km를 달려 26일 오전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김 씨는 이날 폴란드 코르초바 국경검문소에서 40km 떨어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설마 했는데, 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들리니 무조건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며 “러시아군이 탄도미사일 발사부터, 헬리콥터 공습 등 여러 공격을 했다. 총소리, 폭탄음이 들려 가족들 모두 공황 상태가 됐다”고 했다.
그는 즉시 자녀 3명과 부인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태우고 키예프를 출발해 서부 도시 리비프를 거쳐 폴란드로 왔다. 김 씨가 털어놓은 탈출 여정은 지옥처럼 험난하게 들렸다. 급하게 차를 타다 보니 먹을거리는 집에서 가져온 콜라 2병, 와플 3조각, 물 1.5L 1개뿐이었다. “탈출 후에는 10분 이상 잔 적이 없다”고 했다. 졸다가 교통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김 씨는 “가족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우크라 교민 11명 출국 성공… 아직 57명 남아
김 씨 가족은 약 16시간 동안 600km를 달려 24일 늦은 오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 검문소 인근까지 도착했다. 김 씨는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희망이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희망은 금세 절망으로 변했다. 국경 검문소 일대에 우크라이나 피란민의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도로가 꽉 막히고 입국 수속도 늦어졌다.
김 씨는 “국경 검문소 앞으로 차량 행렬이 12km가량 되면서 대기하는 데만 30시간 걸렸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피란민 차량 안을 샅샅이 검사했다.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24일 예비군 징집령 등 국가 총동원령을 내려 18∼60세 남성의 출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인인 부인의 남동생은 예비군 대상이 돼 생이별을 해야 했다. 김 씨는 “아내가 공황 상태다. 형제자매를 키예프에 두고 나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느냐”며 “장모님도 키예프에 남고 함께 나오지 못해 헤어질 때 눈물바다가 됐다”고 말했다.
김 씨 가족뿐만이 아니다. 24일 러시아 침공 이후 48시간 동안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온 피란민은 최소 11만5000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 동남부 도시와 마을에는 역사, 소방서 등 곳곳에 난민 캠프가 차려지면서 지역 전체가 우크라이나 피란민촌이 됐다. 피란 행렬을 곁에서 지켜본 폴란드 주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되살아난다”고 탄식했다. 김 씨 가족은 폴란드에서 휴식을 취한 뒤 체코로 넘어갈 계획이다. 김 씨를 포함해 우크라이나에 체류하던 우리 국민 11명은 이날 루마니아와 폴란드 국경을 넘어 출국에 성공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체류 교민은 총 57명이라고 외교부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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