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용 지하 벙커에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아내를 대피시켜 모두 13명이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밤새 포성으로 느낀 공포를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군이 2일(현지시간) 침공을 시작한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헤르손에 한국인이 남아있다. 이동 위험과 건강 문제로 우크라이나 탈출을 포기한 우리 교민은 모두 26명. 이 가운데 한 명인 박희관씨(37)는 삶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생사를 건 사투 중이다.
박씨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2일까지 메신저를 통해 뉴스1에 현지 소식을 전해왔다. 마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하루, 이틀씩 연락이 끊어지는 고비가 계속됐다.
현지 주민들마저 고국을 뒤로하고 탈출하는 전시 상황에도 박씨는 우크라이나에 남아 그들의 땅을 지키고 있다. 뉴스1은 박씨가 전쟁터 한 가운데서 틈틈이 보내온 생의 기록을 글과 사진으로 정리했다.
박씨는 “무조건 살겠다는 생각과 내 아내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뿐”이라며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건 오직 안전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함께 마을에 있는 개인용 벙커로 대피한 상태다. 벙커는 전시를 대비해 처가에서 미리 만들어둔 시설로, 집과는 5분가량 떨어져 있다. 박씨가 농장 직원들과 두려움에 떠는 직원 가족들을 직접 불러모아 현재 13명이 벙커에 함께 몸을 숨기고 있다.
박씨는 “제가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조국을 사랑하는 아내를 지켜주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남기로 했다”며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한국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벙커에는 우크라이나인 어린이 1명과 65세 이상 고령자 3명도 함께 머물고 있다. 그는 “남자 직원들과 모두 집총 상태로 벙커에서 가족들을 보호 중”이라며 “밤새 상황이 안 좋았고 포성으로 인한 공포는 형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직전까지 헤르손에서 2년째 농업 회사를 운영했던 박씨는 아내와 함께 밀과 체리를 키웠다. 그러나 전쟁 이후 직접 수확한 체리를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맛보여주겠다는 목표도 전부 물거품이 됐다. 닷새 전 겨우 벙커를 나와 들른 농장은 포격으로 구덩이 60여개가 밭을 초토화한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러시아군이 도시 점령을 시작하면서 집 바로 앞까지 포탄이 날아들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박씨는 벙커에서 3㎞ 떨어진 농장과 사업장 확인을 위해 밖을 나서는 시간 외에 벙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그는 “바깥 상황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쉽게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닷새 전 농장에 포격이 60여발 떨어진 것을 봤고 현재는 피해가 더 심각해졌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벙커는 인터넷과 전기 설비를 갖췄지만, 연결이 불안정하다. 감자를 포함한 식량은 보름치가 남아있다. 침구류와 의복 같은 필수 휴대품은 모두 구비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열악하다. 박씨는 “평소에는 반지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머물다가 소리가 매우 크거나 반복적이면 (벙커 내에 따로) 준비한 공간으로 이동한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머물고 있는 헤르손은 현재 전쟁 위기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이고르 콜리카예프 헤르손 시장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러시아군이 헤르손 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일에는 결국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장악했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헤르손 외곽 지역이 러시아군에게 장악당하면서 식료품을 포함한 물자 반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만 아직 전력과 수도는 연결돼 있는 상태로 전해진다.
박씨는 현재 예외적 여권 사용을 위해 대사관에 허락을 구한 상태다. 그러나 승인은 아직이다. 그는 “제 선택에 따른 책임은 제가 진다”고 말했다.
“남아있는 한국인은 대부분 저처럼 가족의 나라를 함께 지키고 계신 분들일 겁니다. 잔류 교민들에게도 용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소식은 ‘다시 찾아온 평화’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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