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헤르만 갈루시첸코 에너지부 장관은 4일(현지 시간) 러시아군 포격으로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에 화재가 발생하자 러시아에 공격 중지를 촉구하며 이같이 말했다. 자포리자 원전은 1986년 폭발사고가 난 체르노빌 원전은 물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보다 큰 유럽 최대 규모의 원전. 화재는 원전 외곽의 5층짜리 교육·훈련용 건물에 났지만 원자로가 포격 당했다면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36년 만에 유럽이 방사능 재앙 위기를 맞을 수 있었던 셈이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공습이 이어지면서 ‘핵 공포’는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러軍, IAEA 경고 무시하고 원전 포격
러시아군이 3일 원전 주변을 포위하자 자포리자 시민 수천 명은 길목에 차량과 타이어, 모래주머니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지에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날 밤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원전 장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4일 오전 1시 40분 경 러시아군 포탄 여러 발이 원전 시설 내부에 떨어져 큰 폭발과 함께 화염이 솟아올랐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포격은 1시간 20분가량 이어졌다.
러시아군이 소방대가 원전 시설 화재를 진압한 것은 4시간 40분이 지난 6시 20분경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화재로 교육·훈련용 건물 3개 층이 탔다고 밝혔다.
앞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일 긴급회의를 열고 자포리자 주변 지역을 장악한 러시아에 “무력 충돌이 원전 시설을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된다”며 경고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자포리자 원전을 결국 장악했다.
전쟁 중 원전 시설이 공격 받은 것은 처음이다. 자포리아 원전은 현재 정비 중이어서 원자로 가동은 중지된 상태지만 핵연료는 원자로 내부에 저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AEA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화재에도 주변 지역 방사능 수치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칫 화재가 원전 시설 전체로 확산되거나 원자로가 직접 폭격당했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드미트리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부 장관은 “자포리자 원전이 폭발하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보다 피해가 10배 더 클 것”이라고 했다. 다만 국내 원전 전문가들은 자포리자 원자로는 최소 1m 두께의 철근콘크리트 격납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체르노빌 때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4일 “열감지기를 갖춘 러시아 탱크는 자신들이 어딜 포격하는지 알고 있다”며 “러시아는 핵 시설을 공격하고 있다. 유럽은 이제 깨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 “원자로 하나만 폭발해도 핵 재앙”
자포리자 원전 화재는 러시아군이 2일부터 민간시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어서 핵 공포는 더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4개 원전에서 원자로 15기를 운영하고 있다. 원자로 3기를 운용하는 남우크라이나 원전이 있는 미콜라이프주는 물론 서북부 리브네 원전과 흐멜니츠키 원전 지역도 러시아군 공격 대상이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원전 전체가 공격 위험에 노출돼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15기 원자로 중 하나라도 폭발하면 모두 끝장”이라며 “러시아를 제외한 어떤 나라도 원전에 포격을 가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러시아군이 점령한 체르노빌 원전도 우려스러운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억류된 원전 직원들이 교대 없이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원전을 운용하고 있어 안전사고 위험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달 28일에는 수도 키이우 인근 방사능폐기물 처리시설 인근에도 미사일 폭격이 있었다. 레이크 바렛 전 미국 에너지부 부국장은 미 폴리티코에 “오염된 토양에 폭격이 떨어져 세슘 같은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는 것이 큰 위험은”이라고 말했다.
미국 등 서방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영국과 스웨덴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는 등 전 유럽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자칫 유럽 전체가 핵 재앙에 휩싸일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자포리자 원전 화재 발생 직후 젤렌스키 대통령과 통화해 대책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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