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세계]생계 내려놓고 부부 모두 자원입대
참전중 뒤늦게 정교회식 예식 치러… “들뜨지만 오늘의 행복은 씁쓸해”
결혼식장에 들어선 신부는 순백의 드레스 대신 카키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흰 면사포를 쓴 신부는 오른팔에 노란색 완장을 동여맸다. 우크라이나 국토방위군 소속이라는 표지였다. 신랑은 왼쪽 어깨에 소총을 메고, 가슴 오른쪽에 무전기를 꽂은 채로 신부의 손을 잡았다. 신부에게 왕관을 씌우는 순서가 되자 하객들이 나와 신부 머리 위에 전투용 헬멧을 씌워 줬다.
러시아의 포격이 열흘째 이어지던 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검문소 앞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 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올린 신부 레시아 필리모노바, 신랑 발레리 필리모노프의 사연이 워싱턴포스트(WP)에 소개됐다.
이날 결혼식에는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도 방탄조끼를 입고 참석했다. 그는 “이 부부는 정교회식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 않고 함께 살다 이제야 식을 올리기로 했다”며 “전쟁 속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계속 살아나간다”고 말했다. 부부의 딸 루슬라나(18)는 영상통화로 결혼식을 지켜봤다.
부부는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침공 직후 국토방위군에 자원해 각자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이후 열흘 만에 결혼식장에서 서로 얼굴을 봤다. 신부 필리모노바는 부케 대신 행복한 사랑을 상징하는 분홍장미 꽃다발을 들고 식을 치렀다.
“결혼식을 하게 돼 들뜨긴 해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조건 행복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져요. 도시는 폐허가 됐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오늘의 행복은 약간 씁쓸하네요.”
전쟁터에서 치러진 결혼식에 하객으로 온 방위군 동료들은 저마다 추진식 수류탄이나 대전차 미사일을 어깨에 둘러맨 채 축하를 건넸다. 부부는 이처럼 무기에 둘러싸여 결혼식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열흘 전만 해도 신부는 지역 스카우트 연맹 대표였고 신랑은 정보기술(IT) 기업을 운영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포격이 시작된 날, 이들은 생계를 내려놓고 나란히 입대했다.
“우리가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이 다 여기(키이우)에 있어요. 이 소중한 것들을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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