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8일(현지 시간) 발표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 조치는 러시아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미국 및 글로벌 경제에도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극약처방’으로 인식돼 왔다. 이 때문에 미국은 당초 이번 조치를 ‘최후의 카드’로 아껴놓으며 실행에는 거리를 둬 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고 국내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 여론이 고개를 들면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 “자유를 지키는 데 비용이 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제재를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번 제재는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고통이 되겠지만 미국에도 비용이 따르게 될 것”이라며 “자유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푸틴의 전쟁은 주유소를 찾는 미국 가정에 이미 피해를 주고 있다”면서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금지로 휘발유 가격이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실제 이번 제재의 충격은 벌써부터 현실화되고 있다. 전미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이날 현재 미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17달러로 일주일 전(3.62달러)에 비해 50센트 이상 치솟았다. 휘발유값 상승의 직접적 원인인 국제유가는 이번 제재로 더 급등할 수 있다. 투자은행 JP모건은 러시아의 원유 공급이 계속 차질을 빚을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85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봤고,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유가 200달러를 점쳤다. 이번 전쟁과 서방의 제재가 장기화되면 원유를 비롯한 다른 원자재값이 동반 급등하면서, 물가는 상승하고 경기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전 세계에 확산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또 서방의 제재로 돈줄이 막힌 러시아가 국가부도를 선언하는 등 경제가 ‘붕괴 시나리오’를 걸을 경우, 다른 신흥국들에게로 금융시장 불안이 퍼질 확률도 만만치 않다.
다만 이번 제재는 EU 동맹이 빠졌다는 점에서 충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미국의 전체 원유 수입분 가운데 러시아산의 비중은 3%에 불과하고, 다른 석유제품까지 포함해도 8%에 그친다. 게다가 미국은 이번 제재에 대비해 자체적으로 베네수엘라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추가로 원유 공급을 받을 계획도 세워놓은 상태다. 이날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도 미국의 발표 이후에는 전 세계 원유 공급에 큰 차질이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오며 오전 상승분을 대부분 반납했다.
● 美, “제재 참여는 동맹국의 판단”
미국과 EU의 에너지 제재 여부에는 각자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러시아 추가 제재에 대한 의회와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었다. 작년 아프가니스탄 철군 문제와 인플레이션 악화로 지지도가 바닥으로 추락했던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이번 사태에 강력히 대응해 지지율을 끌어올린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가스 40%, 원유 25% 가량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는 유럽의 경우는 에너지 수입을 하루아침에 끊기에는 무리가 따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간 미국과 EU는 러시아 제재에서 ‘찰떡 공조’를 자랑해 왔지만, 이번에는 에너지 확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서로 달라서 수입금지 여부를 놓고 찬반이 갈린다. 영국의 경우는 전체 수입분 가운데 러시아 원유 비중이 8%에 불과해 이날 단계적인 수입금지 조치를 발표할 수 있었다.
다만 미국은 다른 동맹국의 참여 여부는 각국이 결정할 사안임을 분명히 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각국이 각자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겠다”고 말했다.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도 CNBC방송에 출연해 제재에 동참하지 못하는 나라들에 대해 “우리는 압박을 주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방의 제재에 대응해 푸틴 대통령은 이날 특정 원자재나 원료의 수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서방의 제재에 대응하면서 보복 효과도 동시에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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