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성(聖)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 행사가 17일 백악관에서 열립니다. 이런 비판이 나옵니다.
“지금 시국에 파티를 연다고?”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 총력전을 펴고 있습니다. 확전일로의 전쟁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이 다른 한편에서 흥겨운 파티를 연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나올만합니다.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바이든 대통령의 개인적 의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 패트릭의 날 행사를 열기 위해 취임 초부터 별렀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쯤 취임 후 백악관의 첫 파티로 성 패트릭의 날을 기념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렵게 되자 아일랜드 총리를 화상으로 연결해 ‘버추얼 파티’를 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올해는 팬데믹이 진정되는 추세를 보이자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총리 부부를 포함한 2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파티를 열기로 한 것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3월을 ‘미국-아일랜드 문화유산의 달’로 선포했습니다.
이런 분주한 움직임은 아일랜드계 조상을 둔 바이든 대통령의 ‘뿌리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 패트릭의 날은 아일랜드 성직자였던 패트릭의 사망일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는 최대 축제날입니다. 아일랜드의 상징색인 녹색 옷과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맥주를 마시며 즐깁니다.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 100여개 도시에서 녹색 차림으로 행진하는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우리나라는 지도자급 인사들이 자신의 연고나 혈통을 거론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다인종 국가인 미국은 다릅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인종적 지역적 배경을 스스럼없이 공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유달리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통령입니다.
아일랜드는 바이든 대통령 연설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웅으로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꼽습니다. 2020년 대선 유세 때는 히니의 시 ‘트로이의 해법’을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당선 축하 전화를 걸면서 ‘트로이의 해법’ 시구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부통령 시절의 바이든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초청한 만찬에서 “내 아일랜드 외할아버지가 영국 개신교도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그 중 한 명인 캐머런 총리와) 한 자리에 앉아 있다니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날 일이다”는 농담을 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정치 생활 50년을 맞는 바이든 대통령은 ‘평민 조(Average Joe)’의 이미지를 쌓아왔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보통 사람 이미지를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일랜드 혈통이 자리 잡고 있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미국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저소득층 노동자 세력을 대변해왔기 때문입니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를 휩쓴 대기근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에 모여 살다가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등 인근 주로 퍼져나갔습니다. 1850년 미국으로 이주한 바이든 가문도 스크랜턴에 살다가 바이든 대통령이 10살 때인 1952년 델라웨어로 옮겨갔습니다. 아버지의 중고차 영업이 성공하면서 바이든 가족은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렸지만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생존 지향적 실리주의는 정치인 바이든의 좌표가 됐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같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반대 세력과의 타협을 중시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은 아일랜드계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미 언론들은 분석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일랜드 혈통을 강조하면서 ‘케네디 연상 효과’도 톡톡히 누렸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이들이 꽤 많습니다. 아일랜드 매체 ‘아이리쉬타임스’에 따르면 현대 역사만 봐도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이 친가 또는 외가 쪽에서 어느 정도든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흑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백인 외가 쪽으로 5대조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아일랜드 조상을 두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선명하게 ‘아일랜드계 대통령’으로 부각되는 인물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과 케네디 전 대통령이 공통적으로 아일랜드에 뿌리를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언론에서는 바이든을 “케네디 사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신자, 민주당 소속이라는 공통점 외에 개인사의 비극도 공유하고 있어 이런 비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치인으로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교통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은 바이든 대통령은 케네디 가문의 비극과 연결되면서 ‘역경 극복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진한 아일랜드 사랑은 입방아에 오르기도 합니다. 국민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대통령의 자격으로 뿌리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은 다른 인종 및 지역 출신들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대선후보 토론에서는 이민 문호 개방을 내세우며 “와스프(WASP·미국의 주류 계급인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는 아일랜드인을 깔보고 무시했다”고 주장한 것은 분열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백악관의 성 패트릭의 날 행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흥에 겨운 나머지 아일랜드에 대한 도를 넘는 애정 표현을 할까봐 주변에서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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