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이 임박했다. 16일(현지 시간) 1억1700만 달러(약 1463억 원)의 달러 표시 국채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러시아는 극심한 외화 부족으로 이미 “루블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방 채권자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아 부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날 지급에 실패하면 1917년 공산 혁명으로 황제를 퇴위시킨 볼셰비키 정부가 제정 러시아의 채무 변제를 거부한 후 105년 만에 국가 부도를 맞는다. 블룸버그는 현재 러시아 정부 및 기업의 외화 부채가 1500억 달러에 이른다며 “디폴트 악몽으로 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 국채 값이 액면가의 10% 이하로 떨어져 ‘상습 부도국’ 아르헨티나 국채와 비슷한 수준이 됐다고 했다.
○ 러 루블 상환 고집에 ‘벌처펀드’도 외면
서방과 러시아는 서로 “상대방 때문에 부도가 났다”며 ‘고의 부도’ 공방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달러 이자를 안 갚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루블로 지급한다”고 주장한다. 6400억 달러(약 791조 원)의 외환보유액이 있지만 약 절반(3000억 달러)이 서방 금융권에 있고, 제재로 사용할 수도 없으니 루블 상환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서방은 애초 달러로 갚기로 한 이자를 루블로 지급하겠다는 억지 주장으로 ‘서방 금융계에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보고 있다. 루블 가치는 침공 전에 비해 약 40% 급락했고,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 서방 채권자는 더더욱 루블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러시아가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국제 금융계의 예상이다. 다만 이자 지급에는 30일간의 유예 기간이 있어 공식 부도는 다음 달 15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이날 1억1700만 달러 외에도 21일(6600만 달러), 28일(1억200만 달러), 31일(4억4700만 달러), 다음 달 4일(21억2900만 달러)에 각각 지급해야 한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당시 러시아는 루블 채권에 대해서만 디폴트를 선언하고 달러 표시 채권은 ‘지급 유예’(모라토리엄)를 밝혔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지금은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현재 러시아 국채는 액면가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달러당 7.6센트에 거래되고 있다.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이 채권을 ‘벌처펀드’ 또한 외면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썩은 고기를 먹는 독수리처럼 부실 자산을 싼값에 인수해 되파는 투자가 전문인 이 펀드조차 높은 부도 위험 때문에 러시아 투자를 기피한다는 뜻이다.
○ “신흥국 위험“ vs “충격 제한적”
러시아의 부도가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러시아에 빌려준 돈이 많은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은행이 채무 회수에 어려움을 겪으면 각국 금융계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특히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터키 등 신흥국에 상당한 악영향이 예상된다. 1998년 러시아 루블 채권의 디폴트가 미국 유명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으로 이어져 미 월가 또한 타격을 입었다.
16일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0.25%포인트 금리 인상과 러시아 부도 선언이 겹치면 인플레이션, 공급망 교란 등에 직면한 세계 경제를 짓누를 수 있다.
반면 러시아의 채무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고 러시아 경제가 세계 시장과 깊게 연계돼 있지 않아 부도 여파가 제한적일 것이란 반론도 적지 않다. 서방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합병한 후 러시아 투자를 줄여 왔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러시아 부도가 금융위기를 촉발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현재로서는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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