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협상에 참여한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우크라이나 측 일부 인사가 협상 직후 심각한 독극물 중독 의심 증세를 겪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8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양국 협상을 방해하려는 러시아 강경파 소행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다만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보도를 대체로 부인해 사실 여부는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WSJ에 따르면 이달 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평화협상 직후 아브라모비치와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루스템 우메로프, 다른 우크라이나 협상단원 한 명이 눈이 충혈되고 눈물을 흘리며 얼굴과 손 피부가 벗겨지는 등의 증세를 보였다. 아브라모비치는 몇 시간 동안 눈이 멀었고 음식 섭취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들은 이후 건강 상태가 개선됐으며 생명에도 지장이 없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아브라모비치와 만난 적이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아브라모비치가 참여한 협상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벌어지는 공식 휴전협상과는 별도로 진행됐다.
사건 배경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부 소식통은 양국 평화협상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 강경론자들이 비밀리에 꾸민 일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비롯한 러시아 정보당국은 오래 전부터 반(反)체제 인사나 적국 정치인을 상대로 독극물 테러를 자행해왔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2004년 우크라이나 친서방 정치인 빅토르 유셴코, 201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직 러시아군 고위 인사 세르게이 스크리팔 등을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조사한 서방 전문가들은 이들 증상이 생화학무기나 전자기 방사선 공격에 의한 것인지 결론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네덜란드 탐사보도전문기관 벨링캣의 크리스토 그로체프 수석 조사관은 “살해보다는 경고 의도로 보인다”며 외부 공격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협상단 일정 때문에 이들의 증상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벨링캣은 러시아 야권 정치인이자 현재 러시아에서 수감 중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2020년 신경작용제 중독 사건을 조사했다. 독일의 한 포렌식 팀도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서 독극물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각국 정부도 독극물 테러설에 일단 거리를 두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고위 당국자는 “이들 사고는 독살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중독 당사자로 알려진 우메로프 의원도 “미확인 정보를 신뢰하지 말아 달라”면서 사실상 부인했다. 다만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국영방송에 출연해 “모두가 뉴스와 선정적인 것에 목말라 있다”면서도 “러시아와 협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말라고 조언한다. 가급적이면 (어느 물체든) 표면도 만지지 말라고 한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잉글랜드 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주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아브라모비치는 영국과 유럽연합(EU)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엔 양국 평화협상에 적극 관여해왔고, 우크라이나 민간인 탈출을 돕는 등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이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에 대한 제재를 자제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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