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세인 요르단 국왕에게 전화할 것 2) 무사 리비아 정보국장에게 전화할 것 3)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에게 전화할 것 4)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화 돌릴 것 5) 중국과의 회담 준비 6) 무지방 요거트 살 것
최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별세했습니다. 대다수 직장인들처럼 그녀도 장관 시절 하루 주요 일정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집무실 책상에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자서전 ‘마담 새크리터리’에 소개된 1998년 1월 28일 일정입니다. 자서전에 나온 올브라이트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날이라는데 미국 외교의 책임자답게 빡빡한 일정입니다.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마지막 항목 ‘무지방 요거트 살 것(Buy non-fat yogurt)’입니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장관” “‘브로치 외교’의 창시자” 등 거창한 수식어의 정치인이 아닌 건강을 걱정하는 평범한 올브라이트 장관의 일면을 엿볼 수 있어 2003년 자서전 출간 때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외교적 업적은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그녀에 대해 공개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 정도가 알려졌습니다. 대부분의 장관들이 백악관에서 열리는 임명식 때 배우자가 옆에서 성경을 받쳐주는 것과 달리 1997년 올브라이트 장관 선서식 때는 딸들이 옆자리를 지켰습니다.
남편 조지프 올브라이트는 ‘뉴욕 데일리뉴스’를 발행하는 신문 재벌 출신의 언론인이었습니다. 자서전과 기타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23년을 함께 산 부부는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이혼을 요구하면서 파경을 맞았습니다. 상대는 올브라이트 장관보다 훨씬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남편의 결정력 장애는 이혼 과정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남편은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이혼을 할지 말지 망설여진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당시 퓰리처상 후보로 올라있던 남편은 “상을 타면 이혼을 안 하고, 상을 못 타면 이혼을 하겠다”는 해괴한(?) 조건까지 내걸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이 불발로 돌아갔기 때문인지 1982년 부부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혼이 많은 미국이지만 공직에 진출한 정치인들은 원만한 결혼생활이 성공의 잣대가 되기 때문에 쉽게 이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 중반인 45세에 이혼을 택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례적인 케이스”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그녀의 부고 기사에서 전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혼 후 커리어의 꽃을 피웠습니다. 워싱턴에서 발이 넓은 남편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이뤘습니다.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이혼 이듬해인 1983년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였던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의 ‘과외 선생’으로 영입되면서부터입니다.
1984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도부는 외교 문외한이었던 페라로 후보의 속성 공부를 위해 조지타운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대학 은사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의 도움으로 1970년대 말 잠시 백악관 의회사무소에 근무한 적은 있지만 과외 교사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올브라이트 장관은 워싱턴에 넘쳐나는 ‘외교관 워너비’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페라로 후보는 대선 TV 토론에서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대결하며 까다로운 핵관련 이슈들도 척척 받아넘겼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주가도 함께 올랐습니다. 이후 조지타운대에서 테뉴어(종신교수직)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그녀의 이름 옆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가며 능력을 눈여겨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2년 당선 후 인수위원회 외교정책 담당 자리를 맡겼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함께 유엔주재 미국대사, 국무장관에 오르며 자신의 목표를 이뤘습니다.
과외 공부를 계기로 알게 된 올브라이트 장관과 페라로 의원은 평생 친구가 됐습니다. 훗날 페라로 의원은 올브라이트 장관에 대해 “가르칠 자료들로 터질 듯한 가방을 들고 비행기 트랩까지 나를 마중 나올 정도였다”며 “이런 열성의 뒤편으로 이혼 후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려는 결심이 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이혼에 대해 “충격(traumatic)이었다”고 자서전에 적었습니다. 당시 심정을 “조(남편)만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내 커리어의 어떤 계획도 포기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부모와 함께 살다가 22세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으로 직행한 그녀는 자립적인 삶에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이혼 위자료로 집과 주식 등을 양도 받아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남편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 때문에 나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통통한 체격과 자주 붉어지는 얼굴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댄스파티 때 외면 받기 일쑤였던 외모 열등감도 자존심 추락에 한 몫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올브라이트 장관은 홀로서기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결혼시절 쌓은 인맥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접대했던 지식인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올브라이트 외교 디너(Albright Foreign Policy Dinners)’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지인들끼리 모이는 소규모 토론회였지만 워싱턴에서 진지하게 정책을 토론할 수 있는 자리라는 명성을 얻게 됐습니다. 이 모임이 입소문을 타면서 올브라이트 장관은 페라로 후보의 과외교사로 추천을 받게 되고 이후 독보적인 외교 커리어를 개척하는 데 발판이 됐습니다.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올브라이트 장관은 1999년 한 강연에서 “이혼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덕분에 오늘 여러분 앞에서 박수를 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인생에서 이혼을 포함한 여러 고난을 만나게 되지만 이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한 결정을 하는 삶을 사는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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