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등 서쪽 인접국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자가용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예요.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은 멀리 대피를 못 가고 국내로 이동할 수밖에 없어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민 올리하 씨(50)는 가족 5명과 함께 서남부 소도시 비지니츠야로 피란을 오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올리하 씨 가족은 키이우를 포위한 러시아군이 아파트 등 민간 시설물을 본격적으로 포격하기 시작한 15일 피란을 결심했다. 버스와 기차 등 대중교통으로 오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기자가 29일 찾은 인구 4000명의 소도시 비지니츠야는 현재 피란민의 수가 5000명이 넘는다. 80㎞ 거리에 인구 26만 명의 체르니우치가 있지만 큰 도시는 러시아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주변 소도시로 몰리고 있다.
비지니츠야 시내 중심가의 극장은 피란민들에게 줄 헌옷을 모으는 물품 창고가 됐고, 주민들 집에는 피란민들이 함께 살고 있다. 한 주민은 식구가 많은 올리하 씨에게 집을 통째로 내줬다. 그는 “처음에는 떠나온 집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났는데 지금은 집을 빌려준 분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이 지역 출신 청년들도 피란민들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 인기 밴드 ‘카즈카(Kazka)’ 멤버인 드리트로 씨(24)는 최근 돌아와 피란민에게 물품 지원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일주일전 피란민을 주제로 제작한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10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드리트로 씨는 “자신의 재능으로 피란민들을 도우려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에도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폭증하면서 곳곳에서 식량, 의료품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조이스 음수야 유엔 인도주의 담당 사무차장은 CNN에 “첫 번째 유엔 호송대가 의약품 300t 이상, 다량의 음식, 물 통조림을 피란민들에 전달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피란민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 약탈, 성범죄 우려도 크다”고 했다.
전쟁이 한 달 넘게 지속되면서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29일 “지난달 24일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인 1100만 명이 집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전체 인구(4400만 명)의 4분의 1에 달한다. 이중 국경을 넘어 폴란드 헝가리 등 인접국으로 간 피란민은 400만 명. 이들은 언론에도 집중 조명되며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650만 명은 더욱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쟁 관리에 집중하고 있어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고 생필품, 의료품도 크게 부족하다.
피란민 200만 명을 받아들인 폴란드를 비롯해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에서 포화상태가 되면서 유럽연합(EU)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28일 회원국 내무장관 회의를 열고 피란민으로 인한 국가별 부담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인구 대비 입국한 우크라이나인 수를 나타내는 ‘피란민 지수’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EU 회원국 간에 정해진 비율에 따라 피란민을 받아들이는 쿼터제 도입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윌바 요한슨 EU 집행위원은 “현재로선 자발적으로 피란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BBC는 “자율적인 피란민 배분은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와 유사한 분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