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우크라이나 서남부 도시 체르니우치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는 책상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매트리스 2장이 깔려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AK47 소총을 잡고 매트리스 위에서 ‘엎드려쏴’ 자세를 하고 있었다. 사격 시 유의 사항과 소총 분해·조립 방법이 빼곡히 적힌 칠판 앞에서 교관이 말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 눈으로만 확인해선 안 됩니다. 귀로 소리를 들어 총의 상태를 점검하고, 몸으로 반동을 느껴 보세요. 자, 발사.”
건축 디자이너인 테이티아나 씨(26)는 “난생처음 총을 잡아 본다”고 했다. 자세는 서툴렀지만 옆으로 세운 책상을 엄폐물 삼아 몸을 낮추고 총을 겨누는 눈빛에 결의가 느껴졌다.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고 싶어 건축학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러시아의 포격으로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총을 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자도 이날 우크라이나 여성 10여 명과 함께 사격 훈련을 받았다. 군복무 시절 M16 소총을 다뤄 본 적이 있지만 훈련을 따라가기 만만치 않았다. 여성들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동포들을 생각하며 진지하게 교육에 임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서서쏴’ ‘앉아쏴’ ‘숨어쏴’ 등 자세를 취했다. 총기 분해법을 배울 땐 꼼꼼히 필기했다.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는 다샤 씨(31)는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할 때도 있다”고 했다. “무기는 인간의 악함에서 나온 산물이지만 저는 그 악함을 이용해 러시아군과 싸울 겁니다. 우리를 지켜야 하니까요.”
우크라 초등교 사격훈련, 절반이 여성… “죽음 두렵지만 싸울것”
“내 가족 친구 조국위해 모두 뭉쳐” AK47 소총들고 실전같은 훈련 우크라이나軍 소속 훈련 교관 “교육후 금세 익숙… 민병대 합류도” 대학생들 “러에 종전 구걸 말아야”… 젤렌스키 “영토 지키기 위해 싸울것”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군대 경험이 없고 건강이 안 좋더라도 입대하고 있어요. 언제든 우리 도시도 러시아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저도 싸우려 합니다.”
지난달 30일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의 한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사격 훈련에 참여한 언론인 나스차 씨는 “죽음이 두렵고 피를 흘리기 싫지만 내 가족과 친구, 조국, 나아가 자유를 위해 모두가 뭉쳤다”고 했다.
○ 대학생들 “러에 종전 구걸 말아야”
훈련을 진행한 우크라이나군 소속 교관 드미트로 씨(42)는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총을 쏠 줄 모르지만 교육을 받은 후 금세 총기를 다룰 수 있게 돼 민병대에도 합류한다”며 “훈련 인원의 50%는 여성”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와 함께 사격 교육을 받은 훈련생 10여 명도 모두 여성이었다. 드미트로 씨는 군 복무 시절 M16 소총을 다뤄본 경험이 있는 기자에게 “당신 군대에 다녀온 게 맞느냐. 우크라이나 여성들만 못하다”며 “AK-47 소총은 1947년에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신뢰할 만한 동구권의 핵심 무기”라고 말했다.
러시아군은 최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포위하던 병력의 20% 정도를 동부 돈바스 등 지역에 재배치했다. 러시아가 동부 지역을 점령하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한 배경에는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13만 명 규모의 민병대가 러시아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친 것도 주효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 대학가에도 저항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체르니우치 국립대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에 대해 “전쟁으로 너무 많은 피해를 봤다. 러시아에 종전을 구걸하지 말고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받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잔츠나 씨(29)는 “회담이 잘 진행돼 전쟁이 멈추길 바라지만 러시아 측의 요구에 굴종하면 안 된다”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연합(EU) 가입, 중립국화 등을 두고 국민투표를 결정하면 투표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 젤렌스키 “영토 지키기 위해 싸울 것”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5차 회담 후 “병력을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문구도 믿지 않는다”며 “우리의 모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중립화 등에서는 양보하지만 러시아가 편입을 시도하는 동부 돈바스 문제는 타협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도 러시아가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을 뿐 군 철수는 진행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최근 24시간 동안 키이우 주변에 배치한 소규모 군대와 기동부대인 대대전술단을 재배치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가 지원하는 민간 용병 조직인 와그너그룹 용병 1000여 명이 배치됐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돈바스를 우크라이나에 내주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4월 1일 온라인 형식의 회담을 열어 휴전협상을 재개한다.
2008년 옛 소련 국가인 조지아에서 분리·독립을 선포했던 남오세티야는 이날 공교롭게도 러시아로 편입을 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해 온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한 뒤 이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가 조지아로 전선을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