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럽에 보내는 천연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지 않으면 공급을 차단하겠다는 대통령령을 31일(현지시간) 공포했다. 가스공사인 가스프롬의 금융기관인 가스프롬방크에 외국환 계좌와 루블화 계좌를 모두 개설해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럽연합(EU)은 영국, 미국과 달리 가스프롬방크를 제재명단에 포함하지 않았다. EU 국가들은 종전대로 가스프롬방크의 외국환 계좌에 유로로 대금을 지불하면 된다. 그러면 가스프롬방크가 유럽의 가스수입국들을 대신해 유로 결제금을 루블화로 바꿔 루블화 계좌로 이체한다.
따라서 가스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할 것을 요구한 이번 대통령령은 러시아가 한 발짝 물러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영국 매체 SKY방송은 분석했다. 러시아가 실제 가스공급 차단을 위협한다기 보다는 EU, 영국, 미국의 연대에 균열을 노린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스프롬이 유럽의 가스수입 업체들을 대신해 루블화를 매입한다는 측면에서는 유럽 기업들이 간접적으로 제재를 위반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막대한 가스대금의 루블화 결제는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고안한 제재를 스스로 위반하게 만들어 제재를 무력화하려는 노림수라고 분석했다.
모스크바 소재 BCS의 론 스미스 수석 원유가스 분석가는 루블화 결제 요구에 대해 “상업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며 “러시아 중앙은행에 가해진 제약에 따른 불편함을 유럽 기업에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제재를 부분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해 설계된 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정치적 압박에 유럽 대륙의 최대 경제국 독일은 ‘조기경보’ 선포로 응수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EU는 가스공급 위기를 관리하는 데에 있어 조기경보, 경보, 비상사태라는 3단계로 나눈다. 조기경보 단계에서는 공급위기 가능성을 식별한 국가는 감시를 강화한다. 비상사태라는 최고 위기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천연가스 수요량의 약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는 독일은 조기경보‘를 선포하면서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경우 가스 배급제를 실시한다는 방침이다. 산업계에 전기 배급을 줄이고 일반 가정, 병원과 주요 기관에 우선 순위가 부여된다.
가스가 배급제가 되면 잠재적으로 경제활동 시간이 줄고 서유럽 특히 독일 경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SKY방송은 예상했다.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서유럽 경제국에 비해 높다. 결국 일부 EU 국가들은 침체 위험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올해 들어 러시아 가스 비중 줄이기에 나섰다. 올해 1분기에 러시아 가스 수입 비중은 40%로 축소됐다. 하지만 수입처 다변화와 신재생 에너지 사용 증가 등을 통해 러시아 가스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은 2024년 중반 이후에 가능할 것으로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부 장관은 최근 전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골드만삭스는 3월 초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모든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면 유로존의 국내총생산(GDP)는 올해 2.2%포인트(p)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구체적으로 독일은 3.4%p, 이탈리아는 2.6%p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완전히 줄이면 “유럽은 깊은 경기침체와 금융위기에 빠져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경제 역시 잃을 것이 많다. 우크라이나의 침공으로 이미 러시아 경제는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 휩싸여 올해 심각한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애널리스트들의 전망을 종합해보면 러시아 경제는 올해 전쟁 여파로 최소 8%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매일 유럽으로부터 받는 가스대금은 최대 8억유로에 달하는데 공급을 차단하면 하루 8억유로라는 돈이 끊긴다.
올해 초 독일 키엘 세계경제연구소(IfW)는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중단된다면 그 충격은 유럽보다 러시아에 더욱 클 것으로 전망했다. 연구소는 가스 거래가 중단되면 러시아의 GDP는 약 3%p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러시아와 유럽 모두 막대한 판돈을 걸며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SKY방송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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