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술대학 출신의 참전용사가 한국전쟁에 투입됐을 당시 그렸던 스케치화와 수채화들이 뒤늦게 세상에 공개됐다. 그의 그림에는 1951~1952년 자신이 복무한 강원도 시골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와 임무 수행 모습, 마을 풍경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한국전쟁유업재단은 9일(현지 시간) 미국인 로저 스트링햄 씨(93)가 당시 그렸던 그림 50여 점을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했다. 유업재단은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세계 각국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해 이들의 증언을 수집,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2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 태어난 스트링햄 씨는 한 미술대학을 다니던 중 1950년 말 징집돼 이듬해부터 강원도 미 육군 보병사단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부대 인근 야간 순찰을 돌고 보급품의 수송 과정을 지키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화된 그는 자신의 그림 재능을 살려 쉬는 시간마다 스스로 본 것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전쟁 중이라 마땅한 그림 재료를 구할 수 없어 맥주나 담배, 치약 보급품 상자에서 뜯어낸 종이나 연필 가루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스트링햄 씨는 그림을 그리는 대로 이들을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를 전할 겸 미국에 있는 부모에게 보냈다. 예술가인 어머니는 아들의 그림을 모아 1952년 샌프란시스코의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청년 시절 작품들은 전투기나 탱크, 트럭, 전투에 임하는 동료, 야간 순찰 장면 같은 전쟁 도중 급박했던 순간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많지만, 단순히 한국의 자연이나 마을 풍경을 담은 그림도 많다.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일본에서 잠시 복무했을 때는 그림물감과 종이를 사서 한국에서의 시절을 과거 기억을 되살려가며 수채화로 그리기도 했다.
그가 이후 70년 간 자기 집에서만 간직해 왔던 그림들을 세상에 공개하게 된 것은 올 2월 현재 살고 있는 하와이에서 한종우 유업재단 이사장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2012년부터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만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하던 한 이사장은 그에게 우연히 그림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이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재단을 통해 공개하자는 제안을 하게 됐다. 한 이사장은 “스트링햄 씨가 그림들을 어디에 보관할까 고민하고 있길래 이를 우리에게 맡겨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동의했다”며 “앞으로도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통해 각국의 후손들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스트링햄 씨는 한국전쟁 이후에는 자신의 진로를 바꿔서 핵물리학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그동안 한국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던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한국의 마천루와 고속도로, 교통시스템들을 보면서 발전상에 엄청나게 감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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