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법관 9명중 4명이 여성… 성소수자 판결 변화 올까[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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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연방대법원 233년 만의 ‘우먼 파워’
역대 여성 연방대법관은 6명뿐… 첫 흑인여성 대법관 잭슨
오바마 행정부서 여성 2명 임명… 보수 6명-진보 3명 ‘보수 우위’

다른 나라 대법원과 달리 최종심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데다 대법관 9명이 종신직이어서 대체 불가의 막강한 권위를 누리는 미국 연방대법원에 거센 여풍(女風)이 불고 있다. 1789년 설립 후 233년 만에 처음으로 흑인 여성 커탄지 브라운 잭슨 워싱턴 항소법원 판사(52)가 7일(현지 시간)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서 종신직인 대법관 9명 중 약 절반인 4명이 여성으로 채워진다. 역대 대법관 116명 중 108명(93.1%)이 백인 남성일 정도로 소수계가 넘보기 어려웠던 유리천장에 상당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백인 여성 샌드라 데이 오코너(92)는 불과 41년 전인 1981년에야 미 최초의 여성 대법관에 올랐다. 2006년 그가 치매 남편을 돌보기 위해 자진 사퇴한 후 2009년 상반기까지는 ‘미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유대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가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었다. 같은 해 8월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68)가 취임했고 엘리나 케이건(62), 에이미 코니 배럿(50)에 이어 잭슨까지 등장했다. 미 대법원의 변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생전 “여성 대법관이 몇 명 있어야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9명 전부”라고 했다. 대법관 9명이 모두 남성일 때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여성 9명이 무슨 문제냐는 의미다. 지난해 1월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최초의 여성 부통령, 최초의 여성 국가정보국(DNI) 국장,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등이 탄생했고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 최초의 여성 백악관 비서실장, 아시아계 대법관의 탄생 등도 머지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미 최후의 인종장벽 붕괴
잭슨은 흑인으로는 남녀 통틀어 세 번째, 여성으로는 여섯 번째 대법관이다. 미 대법원에 최초의 흑인 판사 서굿 마셜이 등장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7년. 1991년 두 번째 흑인 판사 클래런스 토머스가 취임한 지 31년이 흐른 후에야 잭슨이 발탁됐다. 그는 고령을 이유로 종신 임기를 지키지 않고 6월 퇴임 예정인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잭슨은 인준 다음 날 바이든 대통령, 미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최초의 흑인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를 대동한 채 백악관에 나타났다. 그는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애호하는 흑인 여성 시인 마야 앤절루의 시구 “나는 노예의 꿈이자 희망”을 인용하며 자신의 조부모 세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이날 거의 모든 미 언론이 1면에 그의 인준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 정부에 남아 있던 가장 중요한 인종적 장벽이 무너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법조인, 특히 흑인 여성 판사는 그야말로 희귀한 존재다. 미 연방판사 중 여성 비율은 35.7%이지만 흑인 여성만 놓고 보면 5.7%에 그친다. 3억3000만 명 인구 중 흑인 여성 비율(11.4%)보다 훨씬 낮다.

이종곤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잭슨의 후임인 워싱턴 항소법원판사에도 흑인 여성이 발탁됐다. 소수계가 한번 발탁되면 그 후임 또한 소수계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미 법조계의 인종 다양화 움직임이 가속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김명식 조선대 교수(공공인재법무학) 또한 “그냥 여성 대법관 한 명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 대법관의 탄생은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했다.


인종과 성별을 제외해도 하버드대 학사, 하버드대 로스쿨 우등 졸업, 브라이어 대법관의 재판연구원, 지방법원 및 항소법원 판사, 연방 국선변호인 등을 지낸 엘리트 법조인 잭슨이 대법관에 오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잭슨이 특히 형사 사건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호평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지방법원 판사로 일할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법 방해 혐의와 관련해 트럼프 측근들이 의회 증언을 거부하자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라며 출석해 증언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야당 공화당은 줄곧 그를 ‘좌파 급진주의자’로 평가하며 인준을 반대했다. 수전 콜린스(메인)를 포함한 공화당 내 중도 성향 의원 3명이 지지해 간신히 인준은 통과했지만 초당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최초의 여성 대법관 오코너의 인준 당시 표결에 참여한 의원 99명이 전원 찬성했고, 두 번째 여성 대법관 긴즈버그 또한 불과 3명으로부터 반대표를 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 트럼프가 임명한 배럿과 대조
잭슨과 닮은 점도, 다른 점도 많은 인물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발탁한 배럿 대법관이다. 10대 자녀를 둔 워킹맘이라는 점, 각각 야당으로부터 거센 반대를 받았다는 점이 공통점이고 각각 진보와 보수를 대표한다는 점이 다르다.

낙태를 반대하고 총기 소유를 지지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인 배럿은 미 법조계의 보수 대부 고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서기를 지냈다. 모교 노터데임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사람의 인생은 잉태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낙태 반대 논문을 써서 유명해졌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대법관의 전 단계로 여겨지는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발탁됐고 차기 대선이 불과 한 달 남은 2020년 10월 대법관에 임명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으로 타계하자 곧바로 배럿을 지명했다. 바이든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선 승리가 유력했고 긴즈버그 또한 생전 “대선 전에는 나의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보수 대법관을 늘릴 기회라 여긴 트럼프 대통령은 지명을 강행했다.

당시 미 상원은 공화당이 53석, 민주당이 47석이었다. 민주당은 전원 반대표를 던졌고 공화당에서도 콜린스 의원이 반대해 찬성 52표, 반대 48표로 인준을 통과했다. 야당으로부터 단 1명의 찬성표도 얻지 못한 대법관은 미 역사상 배럿이 처음이다.

그는 7명의 자녀를 뒀다. 이 중 2명은 아이티에서 입양했고 직접 낳은 막내아들 벤저민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의 지명 당시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배럿이 학령기 자녀를 둔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며 적극 홍보했다. 강경 보수 대법관의 탄생을 우려하는 진보 진영에 ‘모성애’로 맞선 것이다. 잭슨 또한 보스턴 명문가의 후손인 백인 의사 남편과의 사이에 각각 21세, 17세의 딸을 두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배럿이 강조했던 모성애가 잭슨의 인준 과정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했다.
○ 오바마는 여성 대법관 2명 임명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중 여성 대법관 2명을 임명한 최초의 미 대통령이다. 이 중 푸에르토리코계인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현 대법관 9명 중 진보 성향이 강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판사 시절 “현명한 라틴계 판사가 백인 남성보다 더 나은 판결을 할 수도 있다”며 사법부의 인종차별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보수 텃밭인 남부 텍사스주가 주법으로 ‘낙태금지법’을 강행한 후 대법원이 합헌 결정을 내렸을 때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다수 대법관이 현실을 외면했다”며 동료를 비난했다. 대법원에서 금기시하는 동료 비판을 꺼리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급진 성향이 성장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출생지인 뉴욕 브롱크스는 빈민가이며 알코올에 의존하던 부친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모친의 높은 교육열과 본인의 의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법관까지 올랐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폭발적인 불화로 계속된 긴장 상태’로 묘사할 정도로 아픈 기억이 많다.

2010년 임명된 케이건은 진보 성향이지만 보수와 진보 양측의 견해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얻는다. 별명 또한 좌우를 잇는다는 뜻의 ‘교량 건설자(bridge builder)’. 그는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후 교수로 일했고 2003년 여성 최초의 하버드대 로스쿨 학장이 됐다. 다른 대법관과 달리 판사 경력이 전무한데도 대법관으로 뽑혔다.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로 활동할 당시 지역의 유명 인사였던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 보수 우위 대법원과 충돌하는 바이든

여성 대법관의 증가가 성소수자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잭슨은 인준 청문회에서 공화당 의원이 ‘여성의 정의’에 관해 묻자 “답하지 않겠다. 난 생물학자가 아니다”라고 받아쳤다. 그가 성소수자를 옹호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대법관 또한 2020년 ‘기업이 특정 직원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이끈 바 있다.

다만 바이든 행정부가 9명의 대법관 중 보수 성향이 6명, 진보 성향이 3명인 현 대법원과 거듭 충돌하는 상황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텍사스주의 ‘낙태 제한법’ 시행을 중지해 달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요청을 기각했다. 임신 6개월 이전의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보장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즉각 “매우 우려스럽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대법원은 올 1월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을 높이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가 시행한 민간기업의 백신 의무 접종 조치 또한 개인 선택권을 침해한다며 무효화했다. 3월에는 집권 민주당 소속인 토니 에버스 위스콘신 주지사가 흑인 인구가 늘어난 선거구를 분할해 기존 6개에서 7개로 늘리자 “위헌”이라며 불허했다. 개별 주가 획정한 선거구를 대법원이 뒤집은 것은 미 역사상 처음이다.

대법관 개개인의 윤리 문제도 불거졌다. 보수 성향인 토머스 대법관의 부인이자 트럼프 지지자로 유명한 로비스트 지니 토머스는 2020년 대선 기간 중 마크 메도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과 29차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진보 진영에서는 “대법관의 배우자가 대선에 개입했다”며 유착 의혹을 제기했다. 긴즈버그 대법관 또한 생전 변호사 남편의 관련 소송에서 남편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 구설에 올랐다.

이에 따라 대법원의 중립성과 신뢰도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민감한 사회 현안에 대한 판결이 헌법에 근거해 중립적으로 내려지지 않고 법관 개인이 선호 또는 지지하는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이뤄진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지난해 10월 미 그리넬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는 “대법원 판결은 헌법과 법률이 아니라 정치에 좌우된다”고 했다.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오늘날 대법관들이 스스로를 일종의 정치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대법원이 정치기관으로 전락하면 헌법을 지탱하는 근간이 무너지고 국민 불신이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를 감안할 때 대법원의 자정 기능 강화, 더 많은 다양성이 추가된 대법관 구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법관에게 종신 임기를 보장해준 것 또한 낙태, 대학 입시 등에서의 소수계 우대(어퍼머티브 액션), 총기, 투표법, 성소수자, 종교 자유, 사형제, 인종차별 등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의제에 대해 외풍에 휘둘리지 말고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리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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