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타임스는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의 소설가 류브코 데레시가 쓴 “귀청을 찢는 사이렌이 우크라이나의 새 모습(The Piercing Sound of Ukraine‘s New Reality)”이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키이우에서 사이렌 소리를 처음 들은 건 2월24일 오전 7시쯤이었다.
그날 새벽 5시35분, 어머니가 르비우 근처 작은 마을에 사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전쟁이 터졌다고 했다. 밖에서 폭발음이 두차례 연달아 들렸다. 먼 곳에서 포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집사람을 깨웠고 함께 미친듯이 페이스북을 뒤진 끝에 폭음이 키이우 대공포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 즈음 또다른 폭발음이 들렸다. 유리창이 떨렸고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렸으며 놀란 까마귀떼들이 하늘을 덮었다. 바로 그때였다. 인접 지역에서 공습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단조로운 음색의 소리가 도시 전체에 퍼졌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지금 키이우 사람들에게 사이렌 소리는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아침, 저녁마다 울리고 부활절에도 울렸다. 말도 안되는 이번 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기분은 완전히 사라졌다. 두 달 넘게 항거해온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예전과 같은 세상이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나로선 평화로운 듯한 수도의 분위기를 깨트리는, 귀청을 찢는 사이렌 소리가 온당치 않은 새로운 존재 방식을 상징한다. 우리 모두 목숨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쟁 첫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집사람과 나는 다른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고 실존적으로 중대한 문제들에 답해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량을 쟁여야 하나 아니면 군대에 자원해야 하나?
우리는 남았다. 먼저 모든 창문에 X자로 테이프를 붙였다. 폭발로 유리 파편이 날아다니지 않도록 했다. 당국은 공습이 계속될 거라며 대피하라고 했지만 집주변을 살펴봐도 마땅히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학교 옆 방공호는 이미 여자들과 아이들로 만원이었고 내가 사는 9층 짜리 아파트 지하실로 대피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이리저리 따져본 뒤 우린 사이렌이 울리는 동안 아파트에 남아 2개의 벽 원칙을 믿기로 했다. 최소 2개의 벽으로 이뤄진 공간에 대피해야 안전하다는 원칙이다. 첫번째 벽이 폭발력을 감쇄시키고 두번째 벽이 벽과 유리창 등의 파편을 막아준다는 원칙이다. 많은 키이우 시민들처럼 우리도 복도와 목욕탕에 식당과 사무실, 침실을 꾸렸다.
많은 키이우 시민들이 시당국 권고를 따라 지하철 등 대피시설로 갔다. 전쟁 첫날 친구인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 스타니스라우와 부인 올레나가 짐을 꾸려 사이렌이 울리면 지하철로 대피할 준비를 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겨울 코트와 부츠를 신은 채 아파트에서 잠을 잤다. 최대한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발을 카우치 밖으로 늘어트린 채였다.
한 밤중에 다시 사이렌이 울렸고 두 사람은 아파트 옆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스타니슬라우는 “작은 가방 2개를 들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오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같아 슬펐다. 많은 물건들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걸 담담히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에 정말 큰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전쟁 첫 날 키이우에 사이렌이 두 차례 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곧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수십년 전 소련 시대 설치된 공습경보였다. 전쟁 전까지 시 당국이 옛 아날로그 방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려 했지만 전쟁이 터질 때까지 하지 못했다. 키이우 전역에 설치된 150개의 확성기로는 도시 전체에 경보를 울릴 수 없었다.
침공 뒤 며칠 만에 시민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새로운 방법들이 가동됐다. 키이우의 공습 경보는 키이우시국가행정부 공식 텔레그램에 올라가고 국가비상국이 문자 메시지로 발송한다. 전쟁이 터진 지 며칠 안돼 ’공습경보(Air Alam)‘이라는 앱이 개발돼 매우 정확하고 (큰 소리로) 사이렌을 울린다.
집사람과 내가 사는 동네는 키이우 외곽이어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기에 이 앱을 다운받았다. 그런데 사이렌 소리에 집사람이 너무 놀랐다. 집 안에 확성기를 단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앱을 지워버렸다.
들었는지 못들었는지가 확실치 않게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 때문에 도시에 사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사이렌 환청 증상을 겪고 있다. 밤이 돼 조용해지면 특히 진짜 사이렌 소리를 들었는지 환청을 들었는지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지난 달 키이우의 사이렌 소리가 줄면서 사이렌 소리가 바뀌었다. 2월24일 러시아가 침공한 이래 키이우에 공습 사이렌이 300번 이상 울렸다.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 특히 키이우 주민들은 사이렌 소리를 전과 다르게 받아 들인다. 스트레스에 신속하게 반응하지 않고 위험을 긴박하게 느끼지 못하는 방어적 심리상태가 된 것이다.
스타니슬라우와 올레나는 거의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나와보지도 않은 채 지하철역에서 생활한 끝에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통행금지가 길어질 때만 지하철 역으로 대피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사이렌이 울리면 의자를 가지고 복도로 나갈 뿐이다.
러시아의 잔혹한 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용감한 사람들이 나섰다. 알렉스 피안이 르비우 중앙역 광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이렌의 울부짖음에 맞춰 한스 짐머 작 “타임(Time)”을 피아노 연주한 것이 유명해졌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르비우, 이바노-프랑키우스크, 비니치아 같은 곳에선 사이렌 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폭격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다니고 아이들과 유모차와 함께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난달 18일 미사일 공격으로 르비우에서 7명이 숨지면서 사이렌을 무시하면 크게 위험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웠다.
아침마다 공습당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지만 무섭다는 생각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다. 로또 추첨일이 되면 당첨을 바라는 마음처럼 마음 한 켠에 웅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보 시스템은 적 미사일의 목표 지점을 사전에 알려주지 못한다. 방향을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시인 빅토리아 아멜리나의 표현대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안 룰렛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한다. “전국에 공습이 울리면 / 매번 모두가 느낀다 / 발사 / 죽는 사람은 한 명뿐.”
스타니슬라우가 러시아 침공 이후 위안을 얻는 예술품이 있다고 했다. 작가는 모른다고 했다. 2차대전 때 유대인 여성들이 집단수용소로 줄지어 끌려가며 눈물을 흘리는 사진과 헬멧을 쓰고 무기를 든, 완전 무장한 현대 이스라엘 여성들의 활짝 웃는 모습을 섞어놓은 콜라주 작품이다. “역사의 교훈을 표현한다”고 했다.
스타니슬라우에게 키이우의 사이렌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현재의 이스라엘과 역사의 교훈을 알리는 작품이 떠오른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도시에 울리는 사이렌은 이제 수업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학교종 소리가 됐다.
얼마 전부터 이런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21세기 유럽국가의 수도에서 울리는 공습경보 사이렌이 주는 참 의미를 깨달은 것 같다. 사이렌은 역사의 교훈을 알리는 종소리다. 지금 이 교훈을 터득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머지않아 피를 흘리며 깨달은 지혜를 나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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