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부터 49년간 유지됐던 여성의 낙태권 보장 판결을 뒤집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문 초안이 사전 유출된 뒤 미국의 정치·사회 분열이 격화되고 있다. 미 대법원의 판단이 정치 논란의 한복판에 서면서 미 전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간) 성명에서 “여성의 선택권은 근본적 권리”라며 임신 24주 이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기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삼권분립 원칙이 엄격한 미국에서 행정부 수장이 사법부의 움직임에 정면으로 제동을 걸 정도로 낙태권이 보수와 진보 진영 간 갈등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
집권 민주당은 낙태권을 추가로 보장하는 입법에 나설 뜻을 밝혔다. 야당인 공화당은 “태아의 생명도 존중해야 한다”며 판결문 초안을 지지한다고 맞섰다.
미국 사회가 낙태권 찬반 논란으로 갈라지면서 11월 중간선거를 6개월 앞둔 미 정치권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유권자들이 중간선거에서 낙태권 옹호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낙태 찬반론자들은 3일부터 뉴욕, 워싱턴 등 미 대도시에서 피켓을 들고 각각 시위를 벌였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날 유출된 판결문 초안이 진본임을 인정하고 유출 경위와 원인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여성 선택권 vs 태아 생명… 낙태권, 美중간선거 최대 이슈될듯
낙태권으로 쪼개진 미국 ‘낙태권 보장’ 판례 기각 전망에 美사회 진보-보수 갈등 극에 달해 뉴욕-LA 등서 격렬 시위 벌어져 민주 “연방차원 낙태권 보장법 추진”… 공화 “대법, 활동가 압력 굴복 말아야” ‘로 대 웨이드’ 판례 뒤집는 판결땐, 상당수 州서 낙태 금지법 시행될 듯
“내 자궁은 네 것이 아니다.” vs “태아 살해는 용납할 수 없다.”
임신 24주 이전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을 수 있는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후 미국 사회가 낙태권 찬반 논란으로 완전히 쪼개졌다. 여성의 자기 선택권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진보 진영과 태아의 생명을 강조하는 보수 진영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중 3명의 보수 대법관을 임명해 종신직인 대법관 9명 중 6명을 보수 법관으로 채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판결문 초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내고 사법부와 대립했다. 치솟는 물가 등으로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수세에 몰렸던 집권 민주당은 물론이고 야당 공화당까지 이 사안을 지지층 결집에 이용할 뜻을 보이면서 미 사회의 대립과 혼란 또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민주 ‘낙태권 추가 입법’ vs 공화 ‘주정부 소관’
미 최초의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3일 “공화당 입법권자들이 여성에 반해 법을 무기화하고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울 시점”이라고 낙태권 찬성 의사를 밝혔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의회 차원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별도로 추진하겠다고 했고 에드 마키 민주당 상원의원은 아예 대법관을 현 9명에서 14명으로 늘려 대법원의 보수 우위 구도를 무너뜨리겠다고 가세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근대사 최악의 판결”이라고 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활동가의 압력에 굴복하는 법원은 사법적 정당성을 약화시킬 뿐”이라며 대법원이 정치적 혼란과 반발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 또한 “연방정부가 아닌 주정부와 주의회가 담당할 사안”이라며 대법원을 옹호했다.
이번 논란의 연원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화당 텃밭으로 꼽히는 중부 미시시피주는 2018년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했다. 강간,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논란이 거셌고 반발한 한 산부인과가 주정부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냈다. 1, 2심에서 모두 원고가 이겼지만 주정부가 상고해 최종심과 헌법재판소 역할을 겸하는 미 대법원까지 왔다. 이 소송은 2020년 에이미 배럿 대법관의 취임으로 대법원의 이념 지형이 보수 6 대 진보 3으로 완전히 보수 우위가 된 후 맞이한 첫 번째 낙태법 심리다. 강경한 낙태 반대론자인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작성한 초안이 2일 유출되면서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 공화당 우세 주는 ‘낙태금지법’ 굳히기
대법원이 빠르면 다음 달 말이나 7월 초 기존 판례를 뒤집는 최종 판결을 내린다면 미 50개 주 곳곳에서 낙태금지법 강화가 예상된다. 이미 주정부 차원에서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한 텍사스 등을 뒤따르는 주가 많아질 것이란 의미다. 케빈 스팃 오클라호마 주지사(공화당) 또한 3일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금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켄터키, 루이지애나 등 13개 주는 대법원이 낙태를 금하면 소위 ‘방아쇠 법안’(소총이 자동 발사되듯 주정부가 연방정부의 판결을 따르는 것을 지칭)에 의해 주정부 차원에서도 낙태가 금지되는 법안을 이미 통과시켰다.
현재 미 50개 주 중 낙태금지법을 추진하거나 낙태권을 폐지한 곳은 절반이 넘는 26개 주다. 블룸버그는 미국의 상당수 주가 터키, 튀니지 같은 일부 이슬람 국가보다 엄격한 낙태 규정을 갖게 될 것으로 점쳤다. 터키와 튀니지는 각각 임신 10주, 3개월까지의 낙태를 허용한다. 3일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등 주요 도시에서는 낙태 찬반론자가 모두 시위를 벌였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불합치 결정을 내려 2020년 1월 1일부터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국회가 법 개정에 나서지 않아 입법 공백이 계속되고 있고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찬반양론도 끊이지 않는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24주 이내 여성의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해 미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결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부 텍사스주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제인 로(Jane Roe)’라는 가명으로 소송을 냈고 지방검사 ‘헨리 웨이드(Henry Wade)’가 사건을 맡아 이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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