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갔다고 했을 때 그저 먼 나라 얘기인 줄 알았다. 평소 마트에서 파는 명태가 대부분 러시아산이기에 ‘당분간 명태 값이 오르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농수산물 값이 전부 올라 생활비가 평소보다 20% 정도는 늘어난 것 같다. 전쟁의 무서움을 실감했다.”(50대 주부 김모 씨)
“요즘 체감으론 물가가 20~30%가량 높아진 것 같다. 특히 고기 가격이 많이 올랐다. 어려운 형편에 한 끼 식사를 위해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반찬 가짓수를 줄일 수도 없고 고민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기부금까지 줄었는데 어떻게 무료급식을 이어나갈지 걱정이다.”(서울 시내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종교단체 관계자)
기름값 폭등으로 교통 물가 13.8%↑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국내 가계(家計)의 경제적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곡물 등 주요 식량자원의 글로벌 생산·수출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가 전쟁 참화를 겪고, 러시아가 국제사회 제재를 받으면서 국내 소비자들까지 상당한 경제적 손해를 보는 상황으로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 동향’에 따르면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4.8% 올랐다. 3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지난해 동기 대비 4.1% 오른 것에 이은 상승세다. 지출 목적별 동향을 살펴보면 4월 식료품 및 비주류(非酒類) 음료 물가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6%, 음식 및 숙박 물가가 6.5% 올랐다. 유류 가격 폭등으로 교통 물가는 13.8% 올라 물가상승을 이끌었다. ‘주간동아’가 국내 물가 관련 통계를 종합해 살펴본 결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내 가계에 적잖은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당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당초 러시아산 의존도가 높거나 유통 과정에서 러시아를 경유해야 하는 수산물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이다. 5월 10일 기준 3266원인 냉동명태 1마리 소매가는 지난해 같은 때(2580원)와 비교해 26.6% 올랐다(그래프 참조). 흔히 동태로 불리는 냉동명태의 러시아산 의존율은 지난해 기준 96.1%에 달한다. 명란(89.2%), 북어(92.7%) 등 명태 가공 수산품이나 대구(93.6%), 대게(100%)와 함께 러시아 의존 비율이 높은 품목이다. 1990년 한국-소비에트 연방 수교 이래 양국 관계에서 명태 수입은 주요 외교 의제이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는 동해 조업으로 국내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으나 지구온난화와 남획으로 명태 어군이 러시아 해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다만 명태 물량이 당장 부족한 것은 아니다. 3월 한 달간 국내에 수입된 명태 물량은 4만8637t으로 전달 대비 30%가량 늘었고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70% 가까이 많았다. 국내 명태 비축량도 11만7224t으로 넉넉한 편이다.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대대적으로 명태 수입량을 늘렸기 때문이다. 수산업계에선 일부 도매상이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사재기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명태보다 가격이 더 오른 연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탄’을 맞은 품목이다. 5월 10일 기준 연어 1㎏ 가격은 약 3만 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 1만1000원보다 172.2% 급등했다. 국내에 수입되는 연어는 대부분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산이다. 러시아산은 아니지만 러시아 상공을 경유해 항공편으로 수입된다. 러시아는 개전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의 국적기가 자국 영공을 지나지 못하도록 영공 폐쇄 조치에 나섰다. 국내 항공사도 안전을 우려해 러시아 노선 운항을 중단한 상태다.
“전쟁 오래 끌면 수산물 가격 더 상승”
이에 대해 국제 수산업 분야 전문가는 “국내에서도 연근해 어업이나 내수면 양식이 활발해 러시아산 수산물을 대체할 여력이 크다”면서도 “코로나19에 따른 국제 물류망 혼선,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유가 상승 등 악재가 겹치면 국제 수산물 가격이 전반적으로 더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시장에도 악재가 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5월 11일 기준 국내 휘발유 유통 가격은 L당 1942.38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1542.6원)와 비교해 25.9% 올랐다. 경유 가격도 중형차를 가득 채울 시 13만5660원으로 9만3779원이던 지난해 동기 대비 44.7% 급등했다. 보통 70L 정도가 들어가는 중형차 연료통을 한 번 가득 채우려면 지난해에는 9만3779원이 들었는데 현재는 13만5660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차주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한 달에 3~4회 주유한다고 가정하면 월 12만5643~16만7524원 유류비 부담이 늘어난 셈이다.
유가 상승의 주요 원인은 국제사회의 대(對)러시아 경제제재다. 미국은 3월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금수조치를 발표했고 유럽연합(EU)도 이에 동참할 예정이다. 미국 등 서방 사회의 제재에 러시아도 자국산 원자재의 비(非)우호국 수출을 금지했다. 러시아산 경유 의존도가 50% 이상인 유럽에서 경유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국내 주유소까지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 정부는 5월 1일부터 7월까지 유류세를 30% 인하했지만 당장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유류세 인하 효과는 정유공장에서 휘발유·경유가 출고되는 단계부터 반영된다. 일반 주유소에서 기존 재고량이 소진되기까지 1~2주가량 시차가 생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따른 가장 큰 문제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농산물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 가능성이다. 국제 곡물시장은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국, 인도 등 주요 수출국 물량이 전체 교역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반면 대다수 나라가 이들 국가로부터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 공급자 과점 상태다. 주요 수출국 중 어느 한 나라라도 곡물 생산·수출에 문제가 생기면 그 피해는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밀, 옥수수, 대두 등 3대 주요 식량 작물 가격이 크게 올라 3월 한 달 사이 가격지수 상승률은 90%를 상회했다. 국제곡물위원회(IGC) 집계에 따르면 3월 ‘곡물 및 유지류 가격지수(GOI)’는 최근 5년(2017~2021년) 평균치보다 82% 급등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에서 밀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미국 농무부 통계에 따르면 3월 기준 두 나라의 밀 수출량은 전 세계 교역량의 4분의 1에 달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우크라이나 사태의 국제곡물시장 영향 분석’ 제하 보고서에 따르면 2019~2021년 세계 곡물시장에서 우크라이나산의 점유율은 옥수수 14%, 밀 9%, 보리 10%에 달한다. 러시아산 밀과 보리의 시장점유율도 각각 20%, 14%다. 러시아·우크라이나산 밀에 대한 의존도가 30% 이상인 국가는 세계 약 50개국에 달한다. 한국이 밀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다. 최근 3년 동안 한국은 두 나라로부터 사료용 밀을 각각 61만t, 18만t 수입했다.
다만 국내 시장에는 아직 국제 곡물시장의 혼란상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상태다. 한국소비자원 통계에 따르면 5월 10일 밀가루 1㎏의 국내 평균 소매가격은 1463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1362원)보다 7.4% 올랐다. 크림빵 3개 가격은 3387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 3236원에서 4.7% 높아졌다. 일부 수산물, 축산물 가격 인상 폭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한국인의 주식(主食)이 쌀이라는 점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밀 가격 급등의 충격파를 어느 정도 상쇄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5월 10일 기준 쌀 20㎏ 소매가격은 5만1291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6만933원)보다 15.9% 낮아졌다. 자급률 92.8%인 쌀 가격 안정세로 밥상 위 비상사태는 간신히 막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한국의 낮은 전체 곡물 자급률을 고려하면 국제 곡물 가격 인상은 곧 큰 충격파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잖다. 2020년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19.3%를 기록해 처음으로 20%대 선이 무너졌다(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곡물 자급률 통계 기준).
향후 곡물 가격 추이에 대해 김지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해외농업관측팀장은 “올해 2분기 3대 곡물 가격이 1분기 대비 10% 이상,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40%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한 김 팀장은 “이르면 6월부터 북반구 지역에서 밀을 수확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기상 변동이 매우 심해 가격 추이를 예측하긴 어렵다”면서 “당장 전쟁이 끝나 수출이 정상화돼도 우크라이나의 경작지와 사회기반시설 파괴로 당분간 곡물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국제 곡물 가격 인상, 여름부터 국내에 파급”
우크라이나에서도 최대 곡창지대는 북동부지역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곳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농촌에선 농민들이 방탄복을 입고 농사를 짓는 경우마저 있다고 한다. ‘더 타임스’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경작을 방해하려고 우크라이나 밀밭에 지뢰를 매설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사회간접자본이 모두 망가진 것도 문제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주요 항만에 있는 곡물 수출용 대형 사일로 등 설비가 파괴된 것이다. 폴란드 등 주변국을 통한 철도 운송이 이뤄지고 있지만 러시아군은 철도 인프라에도 공습을 이어가고 있다.
곡물 가격 상승은 육류 등 다른 품목으로도 파급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돼지고기 삼겹살 100g 가격은 5월 10일 기준 3739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2394원)보다 56.2% 올랐다. 같은 시기 쇠고기 등심(1+급) 100g 값도 1만7123원으로 32.1% 높아졌다. 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가축 사료 가격 인상이 육류 가격을 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식량 위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두봉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러시아는 천연가스에서 암모니아 질소를 추출해 질산계 요소 비료를 생산·수출하는데 전쟁 장기화로 국내 농업용 비료 수급이 어려워질 수 있다”면서 “이미 러시아와 교역이 차질을 빚으면서 비료 가격이 출렁이고 있고 이는 농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식량위기가 오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다음과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선물 계약한 곡물 물량이 있어 가격이 폭등하진 않았지만, 높아진 선물 가격이 여름 즈음 국내시장에도 본격 반영될 것이다. 올봄 우크라이나의 밀 파종량은 예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여파가 최대 3년까지 지속될 가능성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대체할 다른 주요 곡물 수출국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인도는 4월에 이상고온 현상으로 작황이 좋지 않다. 미국과 남미지역도 가뭄으로 생산량이 줄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공급망이 교란된 점도 변수다. 전쟁과 이상기후, 팬데믹이 중첩된 복합적 식량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유튜브와 포털에서 각각 ‘매거진동아’와 ‘투벤저스’를 검색해 팔로잉하시면 기사 외에도 동영상 등 다채로운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