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선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여권을 받자마자 일자리를 찾아 스리랑카를 떠날 겁니다.”
16일(현지 시간)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 인근에 있는 이민부 앞. 수백 m에 달하는 줄을 선 인파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니르말 씨(20)와 아가시 씨(20)가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이들은 고향 마을에서 5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전날 오전 1시경 이곳에 도착했다. “36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요. 언제 여권을 받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네요.” 이들은 경제 파탄으로 스리랑카가 국가부도를 선언한 뒤 국내에선 도저히 취직이 안 되자 외국에 나가서라도 살길을 찾으려고 여권을 신청하러 왔다고 했다.
이날 이들처럼 이틀째 이민부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다. 대부분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젊은이들이었다. 니르말 씨는 “해외 말고는 일해서 돈을 벌 방법이 없다. 호주나 캐나다로 일하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리랑카는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고유가, 공급난, 저성장이 겹친 글로벌 복합위기에 주력인 관광산업이 붕괴하면서 경제가 파탄 났다. 올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난달 19일 국가부도를 공식 선언했다. 석탄 석유 곡물 식료품 생필품을 수입할 달러(외환보유액)가 바닥나 전역이 패닉 상태다. 동아일보는 공식 국가부도 선언 뒤 국내 언론 중 처음으로 스리랑카를 찾았다.
콜롬보 거리엔 공급이 끊기다시피 한 휘발유를 구하려는 차량 행렬이 주유소마다 2km 넘게 이어져 있었다. 시민들은 주식인 쌀 가격이 “지난해보다 3배 올랐다”고 하소연했다. 콜롬보 인근 감파하에서 만난 농부들은 인플레이션으로 비료값이 폭등하자 농사를 포기했다. 콜롬보 곳곳에선 최악의 경제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정권 퇴진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스리랑카 부도가 글로벌 경제의 복합위기에 따른 것인 만큼 다른 신흥국, 개발도상국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라오스 네팔 파키스탄 페루 레바논 등 아시아 남미 중동 아프리카에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는 국가가 늘고 있다. 스리랑카에 20억 달러(약 2조6000억 원)를 빌려준 인도에도 스리랑카 국가부도의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위라쿤 위제와르데나 전 스리랑카 중앙은행 부총재가 말했다.
세계은행은 미국 등 주요국들이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급격한 긴축에 나서면서 신흥국과 개도국의 금융위기로 이어져 1980년대 경험했던 부채 위기로 내몰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사흘 줄서도 기름 못사는 스리랑카… “연료절약” 주4일제 고육책
‘기름할당제’ 도입 등 극약 처방도… “에너지 절감” 공무원 월~목 근무 금요일엔 채소 등 직접 재배 장려… 저소득층, 가스 못사 나무로 불 때 치솟은 비료값에 농지 대부분 방치… 시멘트값 폭등에 줄줄이 공사중단 전문가 “빵값이 촉발한 ‘아랍의 봄’… 식량위기 남아시아서 재연될수도”
“휘발유를 구하려고 3일 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
15일(현지 시간)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의 한 주유소에서 만난 택시 기사 수닐 씨(65)는 생면부지의 기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그는 “다른 주유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기름을 구할 수 없어 왔지만 여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날 콜롬보 대부분의 주유소에서 차량들이 최소 2km가 넘는 긴 줄을 만들며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차량들로 인근 도로가 꽉 차 일부 차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지난달 19일 국가부도 공식 선언 이후 경제가 파탄 난 스리랑카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주유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 가스 살 돈 없어 나무로 불 때
국가부도 뒤 가장 큰 피해를 본 계층은 저소득층이다. 16일 콜롬보 인근 우다와라와에서 만난 주부 와스나 씨(40) 가족은 20m²(약 6평) 남짓한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가족 6명이 산다. 건축 현장에서 일했던 남편은 국가부도 후 일감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가스를 살 돈조차 벌지 못한다. 와스나 씨는 “가스를 살 돈이 없어 나무로 불을 때 연료로 쓰고 있다”며 텅 빈 액화석유가스(LPG) 통을 들어보였다. 그는 “원래 가족들이 한 끼 분량으로 먹던 음식을 이제는 두 끼로 나눠서 먹는다”고도 했다.
이날 콜롬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쌀 산지 감파하에서 만난 농부 심팟 씨(40)는 국가부도 전만 해도 부농(富農)에 속하는 편이어서 생활이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부도 뒤 비료값 급등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보유한 45에이커(약 5만5000평)의 농지 대부분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그는 비료 살 돈이 없어 2에이커의 땅에서만 쌀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 기름 할당제·공무원 주4일제까지 도입
스리랑카 정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종의 극약 처방까지 동원했다. 칸차나 위제세케라 전력에너지부 장관은 12일 트위터로 “주유소에 개별 소비자를 일일이 등록하게 한 후 매주 정해진 양의 기름을 주겠다”며 ‘기름할당제’ 도입을 선언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24일부터 공무원 등 공공기관 근로자 100만 명을 대상으로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만 일하는 ‘주4일 근무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들이 출퇴근 때 쓰는 연료를 아끼고 매주 금요일은 자신과 가족이 먹을 과일과 채소 등을 직접 재배하도록 장려한다는 명목이다.
문제는 이 정도의 대책만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스리랑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9.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1960년부터 2020년까지 60년간 평균 물가상승률이 연 8.3%였다. 이보다 5배 가까이 높은 상승세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식료품 가격이 57.4% 올라 전체 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콜롬보의 한 대형 마트에서 만난 시민은 “국가부도 선언 전에는 쌀 1kg에 90루피였다. 이제 300루피로 올랐다. 닭고기 1kg도 500루피에서 1300루피로 뛰었다”고 했다.
다른 산업도 사실상 마비됐다. 최근 시멘트값이 4배 이상으로 치솟자 콜롬보 대통령궁 인근에서도 작업이 멈춘 공사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다린튼 폴 스리랑카 건설협회장은 최근 현지 매체에 “전국 건설 현장의 80%가 공사를 중단했다”고 했다.
조충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식량난 위주의 경제 위기가 정국 불안까지 이어졌다”며 과거 빵 가격 급등이 정권 타도로 번진 ‘아랍의 봄’ 같은 현상이 남아시아에서 재연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두봉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와 달리 현재 위기는 원자재, 식량, 금융위기가 겹쳤다”고 진단했다. 그는 “식량 위기는 다른 위기보다 불안 심리의 확산 속도가 빠르다. 스리랑카 등 신흥국에서 시작된 위기가 중진국으로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리랑카 국가부도, 돈 빌려준 인도에도 여파”
스리랑카 중앙銀 前부총재 인터뷰 “20억달러 못갚으면 인도경제 영향… IMF 등 외부 도움 없인 위기 못넘겨”
“스리랑카는 인도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국가부도로 인한 경제적 영향을 인도도 피해 가지 못할 것입니다.”
위라쿤 위제와르데나 전 스리랑카 중앙은행 부총재(사진)는 15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제 위기가 스리랑카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인도는 스리랑카에 20억 달러(약 2조6000억 원)를 빌려줬다. 스리랑카 국가부도는 스리랑카만의 문제가 아니라 채권국 인도를 포함해 국제적 여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는 “스리랑카는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외국 자본 도움 없이는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며 “(최대 채권국인) 중국도 부분적으로 (스리랑카 국가부도에) 책임이 있다. 중국 차관으로 지은 남부 함반토타항(港)이나 공항 등에서 우리가 얻는 달러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리랑카는 중국의 경제 영토 확장 프로젝트인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했다가 중국에 부채를 갚지 못해 항구 사용권을 내줬다.
16일 만난 사즈 멘디스 외교부 경제담당 차관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관광업이 크게 쇠퇴했고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지면서 전체 관광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현저히 줄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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