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첨단 반도체 90% 이상을 생산하는 대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으면서 ‘반도체 안보’ 우려도 커지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3일(현지 시간)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 TSMC 회장을 만나 미국과 동맹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확대를 논의한다. 첨단 반도체를 대부분 TSMC에 의존하는 중국 반발이 예상돼 세계 산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FT “TSMC, 극심한 곤경에 빠져”
펠로시 의장은 이날 마크 리우 TSMC 회장을 만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전날 서명한 반도체 지원법과 미국 투자 확대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미국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과 대만을 가장 중요한 나라로 꼽고 있다. 지난해 미 반도체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10나노급 이하 최첨단 반도체 92%는 대만에서, 8%는 한국에서 생산된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50% 넘게 점유하는 TSMC는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테크 기업에서 쓰는 시스템반도체를 싹쓸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인공지능(AI)과 첨단 무기 등에 쓰이는 최첨단 반도체 대부분을 대만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안보 우려가 적지 않았다. 미 국방 자문기구 ‘인공지능에 관한 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지난해 의회 제출 보고서에서 “중국이 대만과 적대적인 관계여서 미국이 대만 반도체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며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일 서명한 반도체 지원법도 바로 미국에 첨단 반도체 생산기지를 늘리고 중국 기술 발전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세액 공제를 포함해 총 520억 달러(약 68조 원)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TSMC가 미 애리조나주에 짓고 있는 5나노 미세공정 파운드리 공장도 지원 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미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투자가 제한된다는 조항은 TSMC의 발목을 잡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28나노 이상 범용 반도체나 메모리 반도체 관련 중국 투자는 제한 받지 않지만 중국 난징 공장에서 16나노 반도체를 생산하는 TSMC는 향후 증설 투자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삼성전자와 인텔은 중국에서 메모리 및 패키지 공장만 두고 있어 규제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TSMC를 극심한 곤경에 빠뜨렸다”며 “첨단 반도체에 집착하는 중국의 심각한 반발이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로에 선 반도체 안보
대만을 둘러싸고 미중이 물리적으로 충돌한다면 글로벌 테크 산업이 마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던 리우 TSMC 회장은 1일 CNN 인터뷰에서 “대만은 70년 동안 ‘평화로운 섬’이었던 덕분에 반도체 산업이 번성할 수 있었다”며 “중국이 공격한다면 TSMC 공장은 가동되지 못하고 미국 중국 대만 모두 잃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대만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안보 지렛대’로 키우기 위해 첨단 반도체 공정은 주로 대만 내에서 이뤄지도록 유도해 왔다. 미국과의 갈등에 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이 어려워진 중국이 대만 기술자 싹쓸이에 나서자 대만은 올 초 반도체 기술인력의 해외 이직을 제한하고 기밀 유출시 산업스파이로 처벌하는 국가안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짓는 최첨단 미세 공정 파운드리 공장은 2024년 완공 예정이라 향후 2~3년간 대만의 첨단 반도체 생산 기지로서의 위상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반도체 안보 우려에 글로벌 증시는 2일 줄줄이 하락했다. TSMC는 전날 2.45% 급락한 데 이어 이날도 0.30% 하락해 3일 연속 하락세였다. TSMC에서 반도체를 받아 대만 폭스콘 공장에서 아이폰을 조립하는 애플 주가도 이날 1%가까이 떨어졌다.
알프레드 우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미 경영주간지 포춘에 “대만인의 반중(反中) 정서와 달리 TSMC 폭스콘 같은 산업계는 중국 정치인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사업해 왔다”며 “펠로시 의원 대만 방문으로 양측의 끈도 끊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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