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25일(현지 시간) 한때 전력 공급이 완전히 중단됐다. 다행히 예비 전력이 가동됐지만 유럽 내 핵 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유럽 최대 규모의 자포리자 원전이 폭발하면 ‘체르노빌 참사’의 10배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는 원전 통제권을 우크라이나에 넘겨줘야 한다”며 압박했고 국제사회도 대응에 나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83일 째인 이날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주 에네르호다르에 있는 자포리자 원전의 원자로 6기 중 2기에 한때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우크라이나 국영 원전 운영사 에네르고아톰은 “마지막 4번째 송전선이 전력망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침략자(러시아군)들이 원전을 전력망에서 분리시켰다”고 밝혔다. 정전이 90분 이상 이어지면 원자로가 과열돼 폭발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비상 전력이 가동되면서 참사를 막았다.
자포리자 원전의 원자로는 현재 2기만 가동 중이다. 사용 후 핵연료 174개도 보관돼있다. 전력을 공급하는 고압 송전선로 4개 중 3개가 전쟁 초기 파손됐다. 3월에도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원전 부속 건물에 불이 났고, 이달 들어서도 원전 주변에서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이 원전을 우크라이나 전력망에서 분리한 뒤 생산된 전기를 크림반도나 자국으로 빼돌리려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정전이 벌어진다면 냉각 시스템이 멈춰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멜트다운(노심용융)’이 벌어지고, 그 결과 방사능 누출로 이어질 수 있다. 1986년 2만5000여 명이 숨지고 20만 명이 피폭된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이 같은 원인으로 발생했다. 자포리자 원전이 폭발하면 독일, 폴란드, 슬로바키아까지 방사능 물질이 퍼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측은 사고 직후 “우크라이나의 포격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전력 공급이 재개됐고 방사능 누출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전에서 일하는 우크라이나 국적 직원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 전만 해도 1만1000여 명이 근무했지만 현재는 일부만 남은 상태다. 한 직원은 “최근 보름간 직원들이 겁에 질려 빠져나갔다”고 CNN에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5일 연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포리자 원전이 멈췄다. 세계는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한다”며 “러시아가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방사능 재난 직전까지 몰아붙였다”고 비난했다.
같은 날 바이든 대통령도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러시아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원전 사찰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던트 파텔 미국 국무부 수석부대변인은 “원전 에너지를 무기화 하거나 전용(轉用)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도 “전문가들을 자포리자 원전에 긴급 파견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강조했다. IAEA는 러시아와 시찰단 파견을 협상 중이다. 이달 말에서 다음달 초 파견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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