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입니다. 지난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2022년 3월 어느 밤. 누군가의 절규가 겨울 어둠을 날카롭게 찢습니다. “원자력발전소를 그만 공격하세요! 당신들은 이 세상 전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외침이 무색하게도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날 원자로 6기 변압기가 포탄에 맞아 화염에 휩싸입니다. 원자로 4기 외벽에는 대형 구경 총탄 흔적도 보입니다. 자칫 전기가 끊긴다면 원자로 냉각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던 상황입니다.
이날 밤 러시아군은 유럽 최대 규모 자포리자 원전이 있는 우크라이나 에네르호다르 일대를 점령합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3월 23일 자 기사 ‘우크라이나에서 인질로 잡힌 원자력발전소(In Ukraine, a Nuclear Plant Held Hostage)’에는 러시아군이 원전 직원들에게 자행한 대규모 인질극이 소개됩니다.
○ 인질로 잡힌 자포리자 원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총구에 겨눠진 채 일하고 있습니다.”
자포리자 원전에서 NYT에 전달된 익명의 메시지 일부입니다. 러시아군이 진입한 이후 자포리자 원전은 러시아군 500명의 감시 아래 놓입니다. 원전 건물 지붕 곳곳에는 러시아군 저격수가 항시 직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잔혹하기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친위대 로스그바르디야로 추정됩니다.
전시(戰時)에도 원전은 멈출 수 없습니다. 전력을 제공하기 위해, 안전을 지키기 위해 원전을 가동해야 합니다. 8월 말 현재 원전에는 직원 약 9000명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 최소 직원 2명이 포격으로 숨졌습니다.
영국 BBC방송 지난달 11일(현지 시간) 기사 ‘자포리자 원전 근무자들: 러시아 총구가 우리를 겨누고 있다’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원전 직원과 에네르호다르 주민들은 증언합니다.
“약값이 우크라이나군 장악 지역보다 4배 가까이 뛰었다. 의사도 부족하고 현금인출기(ATM)도 운영을 중단했다. 매일 포격이 떨어진다. 인터넷은 끊겼다. 교대 근무를 마치고 ‘납치’되는 직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원들은 현재 러시아 인질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지난달 25일 자 기사 ‘우크라이나 원전 직원 증언: 입막음하려 러시아군이 우리를 고문한다’에는 러시아군이 자행하는 고문 실상에 대한 증언이 나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자포리자 원전 방문을 앞두고 러시아군이 직원들을 가두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얘기입니다.
“경영진은 잡혀 있습니다. 러시아군에 의해 지하실로 끌려갔다 오면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찰단이 방문하면 모든 통제실에는 러시아 인사들이 배치될 것입니다. 그들은 ‘키이우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며 크게 외칠 것입니다.” 원전에 갇힌 직원들로부터 텔레그래프에 전달된 메시지 내용입니다.
○ 우크라이나 전력 20% 생산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원자력발전 의존도가 높은 나라입니다. 원전이 전체 전력 생산의 51%를 차지합니다. 옛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에서 독립하겠다는 노력이 빚은 결과입니다.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주(州) 자포리자 원전은 유럽 최대 원전입니다. 1984년 원자로 1기 가동을 시작으로 올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직전까지 모두 6기의 원자로가 우크라이나 전체 전력의 약 20%를 생산했습니다. 현재는 2기만 운영 중입니다.
원전이 있는 에네르호다르는 러시아가 2014년 무력으로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에서 225km 떨어져 있습니다. 드니프로강을 경계로 왼쪽은 러시아가 오른쪽은 우크라이나가 장악한 상태입니다. 러시아군은 올 3월부터 최전선인 이곳을 점령하고 있지만 원전은 꾸준히 우크라이나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최근 거듭되는 포격으로 원전 내부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등 여러 사건이 반복되면서 안전성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왜 자포리자 원전을 점령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이번 점령이 러시아의 ‘전술적 핵전략’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자포리자 원전의 방사능 유출 위험이 커질수록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핵무기’보다 위협적일 수 있습니다. 원전을 점령하는 것 자체가 우크라이나군에게 거대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 최악의 시나리오… ‘멜트다운’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원자로 멜트다운(melt down, 노심 용융·爐心鎔融, 원자로 냉각장치 이상으로 고열이 발생해 원자로 바닥을 녹이는 현상)입니다.
포격에 의한 원자로 파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전문가들은 1m 두께 콘크리트 벽이 감싸고 있는 원자로가 포격으로 붕괴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말합니다. 방사능 폐기물을 모아두는 격납시설 역시 안전합니다. 정밀 타격을 하지 않는다면 벽이 무너지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위험은 정전(停電)입니다. 원전에 전력 공급이 차단되면 냉각시스템 작동이 중단되고 이 상태가 길어지면 과열된 원자로가 내부에서 녹아내리는 멜트다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자포리자 원전이 붕괴되더라도 과거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태만큼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만약 방사능이 유출된다면 그 범위는 최대 반경 30km로 추정됩니다. 더 이상 에네르호다르를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인재(人災)도 우려됩니다. 5개월 넘은 감시 생활과 예측할 수 없는 포격에 자포리자 원전 직원들은 신경쇠약 직전 상태라고 합니다. 미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원전 위기대응 센터를 봉쇄하고 자신들 벙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직원들만 포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습니다. “‘쾅’ 소리가 들리면 그 후 모두 도망칩니다.” 이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포격으로 인한 진동으로 작업을 멈출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더 큰 문제는 러시아군의 위협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적어도 직원 100명이 구금됐으며 이 중 10명은 실종 상태라고 말합니다. ‘지인이 러시아군에 납치됐다’라는 소문도 돕니다. 한 직원은 WP에 말했습니다. “매일매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 “전쟁은 원전에 적합하지 않다”
IAEA 사찰단은 마침내 1일 자포리자 원전을 방문했습니다. 방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원전을 향한 포격이 멈추지 않자 사찰단은 원전 20km 거리에서 약 3시간 동안 대기해야 했습니다. 이날 원전을 둘러본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원전의 ‘물리적 완전성’이 수차례 손상됐다"라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IAEA는 추가 조사를 위해 이달 3일까지 자포리자에 머물 예정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6개월을 넘었습니다. 도덕이 존재할 틈이 없는 전시 상황에도 인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는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에네르호다르 주민과 원전 직원의 안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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