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우크라 전쟁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축제에 흥청망청”

  • 뉴시스
  • 입력 2022년 9월 7일 13시 17분


우크라이나 전쟁이 6개월이 넘고 러시아 군인들이 수만명 전사 또는 부상했다는데도 러시아 국민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 미 뉴욕타임스(NYT)는 6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전쟁은 먼 세상 이야기라며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국내적 어려움을 막으려는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어느 저녁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공수특전대 부대가 위장복을 입고 불꽃놀이를 하며 전투장면과 같은 춤을 추는 공연이 있었다. 배후에는 이집트에서 온 공연자가 마차를 타고 생명의 상징인 앵크 십자가를 휘드르며 왔다갔다 했고 밴드는 소련시절 전쟁 노래인 “카츄샤”를 연주했다.

러시아 군대와 벨라루스, 인도, 베네수엘라 등 러시아 우호국을 축하하는 축제를 관중석에서 구경하던 나탈리야 니코노바(44)는 “너무 멋져서 말이 안나온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수만명의 병사가 숨지고 전세계 물가와 에너지가 폭등하지만 니코노바는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달라진 게 없다. 물가가 오른 건 사실이지만 견딜만하다”며 이집트군 교향악대에 “카츄샤” 앙콜을 외쳤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물가 급등을 감당할 재정지원을 받는 모스크바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거의 변하지 않은 듯하다. 붉은 광장 옆 럭셔리 상가엔 고객이 넘친다. 물론 프라다, 구치, 크리스티안 디오르 등 서구 상점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식당과 극장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람보르기니와 포르셰같은 고급차도 쉽게 눈에 띈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선탠을 하고 춤추고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고르키 공원에서 만난 율리야(18)는 “제재 때문에 문을 닫은 상점이 있어서 짜증이 나지만 심하진 않다”고 했다. 자신과 친구들이 우크라이나 생각은 잘 안한다고 했다.

푸틴은 전쟁을 위한 징병도 하지 않았고 전사자 장례식도 열지 않았다. 그때문인지 러시아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전쟁은 푸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지만 러시아 국민들의 삶은 푸틴 생각대로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박물관과 극장 대부분 문을 열었고 모스크바강에는 흥청망청하는 파티선들이 떠 있으며 사람들은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하고 있다. 오페라와 발레 가을 공연이 막 시작됐다.

모스크바 사회경제과학대학원 정치철학 교수 그렉 유딘은 “러시아인들은 일상생활을 지속하려 한다”고 말했다.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온 것이 푸틴 시대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지도자들이 “최우선시하는 일이며 지금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다만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과 달리 일부 지식인들은 이같은 일상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주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마지막 지도자의 장례식에 수천명이 참석해 푸틴에 항의의 뜻을 표시한 것이 한 예다.

아냐(34)라는 여성은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진격한 직후부터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득세 과정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집단적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당신의 이름 아래 누군가가 민간인을 죽이고 있다. 당신의 나라가 북한처럼 돼가고 있다”고 했다. 공무원이던 그는 반전 시위와 청원에 나선 며칠 뒤 사직해야 했다고 했다.

푸틴은 오래도록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해왔고 현재는 체제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1만6500명을 넘는다.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기력한 데 모멸감을 느낀다. 아냐는 “살아 있으면서도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는 사람이 500만, 천만, 2천만명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아냐 같이 무력감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 초기 탈출했다. 그러나 여름 내내 모스크바는 일상을 회복한 모습이었고 루블화 가치 상승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반대 목소리는 침묵됐고 언론은 정부가 장악했다.

한편 푸틴은 러시아 사회를 서서히 군사화하고 있다.

모스크바 간선도로마다 자신의 계급과 직책을 밝힌 군인들 입간판이 늘어서 있고 더 많은 것을 알려면 QR 코드를 찍으라고 안내하고 있다. 러시아군을 축하하는 행사들도 끝없이 이어진다.

모스크바 남서쪽 알비노 훈련장에 모인 수천명의 관중들이 탱크 바이애슬론 등을 펼치는 육군국제경기를 관람했다. 러시아는 2013년 이 대회가 시작된 이래 항상 1등을 차지해왔다. 11살과 4살 자녀와 함께 이곳에 온 일랴(34)가 “TV에서만 보던 것들을 실제로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는 “전쟁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특별군사작전’을 말하는 건 아니다”고 했다. “우리 지도자들을 믿으며 그들이 필요한 일이라고 하면 그런 것”이라고 했다.

군 축제에 전시된 킨잘 미사일 등 무기를 실제로 보면 강한 나라에 산다는 느낌이 든다는 사람도 있다. 킨잘은 우크라이나에서 실제로 사용됐다.

냉전 시기 후반 동독에서 탱크를 몰았다는 안드레이 예프게녜비치(55)는 전시된 무기를 보면서 소련이 강력한 초강대국이었을 때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소련 시대에 자랐고 조국을 사랑한다. 무기전시가 애국심을 갖게 한다”고 했다. 제재에 대해 묻자 “달라진 걸 모르겠다. 미국과 서방이 더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TV에 늘상 등장하는 말이다. 국영 매체들은 매일 독일이 직면한 천연가스 가격에 따른 혼란과 유럽과 미국의 물가상승을 보도한다.

육군 훈련장에서 어린이들이 “파시스트를 무찌르자”라고 쓰여 있는 탱크를 구경하고 성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동소총을 쏘아본다. 그러나 자원병 모집 부스는 텅비었다. 애국심이 커진다지만 사람들은 푸틴 전쟁에서 싸울 마음은 없는 듯했다. 한 모병관이 “아직은 지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해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곤 하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행사들도 많다.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모스크바에서 몇 시간 거리의 니콜라-레니베츠의 예술공원 숲속에서 열린 최근 축제가 1만6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4일 동안 이어졌다.

얼굴에 번쩍거리는 화장을 하고 털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무대에서 레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다른 예술가들처럼 러시아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군중들이 환호했다.

해외에 머물다가 러시아로 귀국한지 얼마 안됐다는 이반(25)은 “처음엔 400km 밖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축제에 온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인생은 계속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붉은 광장 축제에서 만난 눈썹미용사 에카테리나(26)는 남자친구가 군인이라며 음악소리에 “신이 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앞 양쪽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곳에선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낸다. 이곳은 전쟁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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