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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왕자의 690조 프로젝트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타북주. 초고층건물 2개가 200m를 사이에 두고 사막과 산악 지형 170㎞(서울~대전 거리보다 길다)를 가로지른다. 높이 500m의 이 두 건물 사이에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른다. 에어택시와 고속철도가 집과 학교, 직장을 5분 안에 잇는다. 허공에는 로봇 가사도우미가 날아다닌다. 각종 시설에 설치된 인공지능(AI)은 사람들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한다. 거대한 인공 달이 도시를 밝히고, 그린수소 등 녹색 전력이 1년 내내 도시의 기온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사우디가 최근 발표한 최첨단 도시 ‘더 라인’(The Line)의 조감도다. 이 직선 모양의 도시는 외벽이 거울로 만들어져 ‘미러 라인’으로도 불린다. 어마어마하게 긴 두 개의 건축물이 곧 도시다. 사우디는 2030년 도시가 완성되면 900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할 것으로 전망했다. 사막 위에 지어진 궁극의 고밀도 도시가 공상과학 판타지를 넘나든다.
더 라인은 밀레니얼 세대이자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37)의 저탄소 스마트도시 프로젝트 ‘네옴’(NEOM)의 일부다. 5년 전, 사우디는 석유 중심의 경제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 장기 프로젝트 ‘사우디 비전2030’을 발표했는데, 5000억 달러(약 691조 원)를 투자해 친환경 미래 도시 네옴(직선 도시 ‘라인’, 바다 위 산업단지 ‘옥사곤’, 초대형 관광단지 ‘트로제나’)을 건설하는 것이 핵심이다. 네옴시티는 홍해 인근 사막 2만6500㎢ 부지에 조성된다. 벨기에 국가 전체, 서울의 44배 규모다.
네옴은 그리스어로 새롭다는 뜻의 ‘네오’에 아랍어로 미래를 의미하는 ‘무스타크발’의 첫 글자 ‘M’을 합친 단어다.
네옴의 예상 사업비는 5000억 달러이지만, 이를 완성하는 데 1조 달러(약 1380조원)가 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 정부는 오일머니를 우선 투입하고, 나머지는 해외에서 투자를 받을 계획이다. 한국의 2022년 예산(607조 원)을 뛰어넘는 초대형 인프라 사업 기회에 국내 주요 기업들도 물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입찰이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지만 삼성, 현대차그룹 등이 수주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 통학 수영 레인과 사막 위의 스키 리조트
네옴시티의 구상을 보면 로봇 이야기는 시시하다. 벨기에 크기의 광활한 사막에 무한한 상상력이 채워지고 있다. 미래학자부터 세계적인 건축가, 실리콘밸리 개발자, 심지어 할리우드 프로덕션 디자이너까지 프로젝트를 위해 다양한 전문가가 모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도시의 자체적인 법률과 규정을 구상 중이다.
건강과 스포츠 부문만 연구하는 파트도 있다. 얀 패터슨 네옴 스포츠 부문 책임자가 언급한 네옴시티의 어린이 등굣길 구상이 인상 깊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있는 기기들이 아이의 신진대사를 검사한다. 냉장고는 전날 밤 당분을 너무 많이 먹은 것을 고려해 견과류바 대신 죽을 권한다. 이 학생은 버스 정류장 대신에 수영 레인을 찾을 수 있다. 방수 배낭을 메고, 학교까지 평영으로 이동한다.
패터슨 책임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면 기대수명을 10년 늘릴 수 있다”고 했다. 네옴은 실제로 내부에 운하를 조성해 수중 통근 옵션을 만드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사막 위 스키리조트도 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지역의 산꼭대기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제설 장비만 있으면 스키 시즌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무함마드 왕세자(MBS)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체육회는 지난달 6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2029년 제9회 동계아시안게임을 네옴에서 개최하겠다”는 공식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우디가 대회 개최지로 선정되면 1986년 일본에서 첫 대회가 열린 이후 중동 및 아랍 국가로는 처음이다.
반면, 미국의 호텔 사업가인 앤드류 워스는 “산악 지형에 인공 호수와 빌딩 등이 포함된 리조트를 지으려면 지형의 많은 부분을 폭파해야 한다”고 미 블룸버그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네옴 스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5개월 만에 퇴사한 그는 “건설비조차 예측하기 어려웠다”며 일할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는 지질학도 모르는데, 절벽 옆에 건물을 매달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네옴시티의 라인 소개. (네옴 트위터)
북한의 류경호텔 또는 최고의 주거 지역
해외 반응은 시큰둥하다.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렵고, 예상보다 많은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호화로운 초고층 빌딩에 푸른 정원이 펼쳐진 신도시의 멋진 경치를 떠올려보자. 이 지상낙원엔 대기오염 대신, 녹지와 편의시설 초고속 대중교통이 있다. 다만 외딴 사막에 있고 홍보용 영상으로만 존재해 실제로 갈 수가 없다”고 비꼬았다.
건물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443m)보다 높은 건물을 170㎞ 길이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부터 대전까지 이어지는 건물을 짓는다고 상상해보자.
건물을 짓는 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CNN은 “세계적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이 도중에 멈춘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북한의 류경호텔(330m)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빈 건물이 되고 말았다”고 전했다.
일단, 짓던 것부터 잘 지으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우디는 2013년에 1007m(168층) 높이의 세계 최고층 건축물 ‘제다 킹덤타워’를 착공했지만, 2018년 70층 정도를 올린 상태에서 사업성 악화로 공사를 중단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인부들까지 떠나면서 언제 완성될지 가늠조차 안 되고 있다.
물론, 킹덤타워는 완성돼도 크게 부각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숙청한 사촌,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감이 넘친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네옴과 평범한 도시의 차이는 구식 노키아 폰과 매끈한 스마트폰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하다”며 “(네옴이) 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네옴의 구상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부 지적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는데, 왜 일반 도시를 복사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역시 수십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이 빈 땅의 모래뿐이었다.
● 애플보다 잠시 비쌌던 기업, ‘아람코’
무함마드 왕세자의 자신감 뒤에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가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름값이 치솟으면서 아람코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였다. 왕세자의 거친 꿈을 실현할 만큼.
2020년 초 코로나19로 배럴당 2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올해 3월 140달러에 육박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아람코의 올해 2분기(4~6월)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0% 늘어난 484억 달러(66조8900억 원)였다. 2019년 말 기업공개(IPO) 이후 분기별 최대 실적이다. 상반기 순이익은 880억 달러(약 121조6200억 원)에 달했다. 5월에는 애플을 제치고 잠시 시가총액 기준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아람코는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돈을 벌었다. 아람코 측은 “높은 원유 가격(P)과 많은 판매량(Q), 높은 정제 마진(제품 가격에서 원가를 제외한 수익)”을 배경으로 꼽았다. 아람코는 기름을 아주 저렴하게 퍼 올린다. 아람코의 원유 추출 비용은 배럴당 2.80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국제 석유 회사들 평균치의 3분의 1 수준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따르면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은 2020년 기준 약 2980억 배럴로 세계 매장량의 17.2%를 차지한다. 1위는 18%의 베네수엘라(3040억 배럴)다.
2019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우디의 미스터리한 원유매장량을 두고 외신들의 비판이 많았다. 사우디는 아람코의 경영권을 미국에서 넘겨받은 1980년대부터 원유 매장량을 줄곧 2600억 배럴이라고 밝혀왔다. 30년간 원유를 내다 팔았는데 매장량이 줄지 않은 것. 아람코가 2019년 IPO 때 외부 평가 기관의 실사를 받으면서 그간 주장한 것보다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 그대로 ‘기름진 땅’ 위에 사우디가 있다.
이 같은 놀라운 규모 덕분에 사우디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로 전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것처럼 사우디는 원유 생산으로 전 세계 석유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고 있다.
네옴으로 흐르는 사우디의 오일머니
다만, 도덕 수업은 빼먹은 것 같다. 사우디는 전쟁으로 수출 제재를 받는 러시아산 원유를 싸게 수입해와 비싸게 팔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WSJ은 “러시아 원유가 사우디와 UAE로 이동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며 “러시아산 원유는 사우디에서 소비되거나, 시장 가격으로 다시 수출됐다”고 했다. 이 같은 사우디의 뒷거래는 미국과의 미묘한 외교 신경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설명한다.
어찌 됐든 아람코가 열심히 번 돈은 네옴으로 간다. 사우디 정부는 아람코 지분 94%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4%는 사우디 왕가 출자로 결성된 국부펀드가 가지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기름으로 번 돈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며 “중앙은행에 예치한 돈은 외환보유고를 보충하거나 국부펀드에 채울 계획”이라고 했다. 네옴을 가동할 돈으로 쓰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아람코는 5월 국부펀드에서 빌린 80억 달러(약 11조600억 원)를 조기 상환하기도 했다.
WSJ은 아람코의 수익 급증이 사우디 경제를 부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원유 부문의 급성장으로 2분기 사우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1.8%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사우디의 GDP 성장률을 7.6%로 예상한다. 10%를 점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플레이션 문제도 남 일이다. 사우디 최대 민간 투자회사인 자드와 인베스트먼트에 따르면 사우디의 6월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2.3% 상승했다. 미국의 물가상승률(7월 8.5%)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적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사우디 경제는 2011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나만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왜 엄청난 돈을 들여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사우디에 부(富)를 안겨준 ‘기름’ 때문이다. 국가 경제에서 기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사우디 경제의 최대 리스크다.
사우디에서 석유 산업은 정부 수입의 70%와 수출의 80%를 차지한다. ‘사우디 경제=오일머니’인 셈이다. 참고로, 기후가 건조한 사우디는 물도 기름으로 만든다. 사우디는 기름으로 시설(해수담수화 플랜트)을 가동해 바닷물을 끌어다가 염분 등을 제거하고, 이를 생활·공업용수로 쓰고 있다. 1978년 사우디에 첫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건설한 회사가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다.
문제는 사우디의 엄청난 원유 매장량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재생에너지 확산은 셰일가스와의 경쟁 이상으로 사우디 경제를 옥죌 가능성이 크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4년과 코로나19 당시 국제 유가 폭락을 지켜보면서 원유에 의존한 통치의 위험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우디는 그동안 오일머니로 국민에게 무료 교육과 의료 서비스, 소득 보장 프로그램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하면서 절대군주제를 구축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이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 왕정 체제부터 흔들리지 않을까.
무함마드 왕세자는 WSJ과 인터뷰에서 네옴을 언급하며 “나는 나만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고 했다. 엄청난 투자가 들어간 네옴이 실패하면 정말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의 길을 걸을지 모른다. 이집트에서는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사우디에서 젊은 층의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현재 3600만 명의 사우디 인구 중 70%가 30세 미만이다. 인구 규모와 나이 비중을 고려하면 석유 산업만으로는 국민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IMF는 “사우디에서 최대 100만 개의 일자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원유 산업은 자본은 필요로 하지만,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다른 산업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관광이나 제조업, 정보기술(IT) 등으로 산업의 무게 중심을 바꾸려는 이유다.
산업 전환 못지않게 사회적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풍부한 석유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하며 자란 사회의 게으름은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며 “기름 중독을 끝내기 위한 왕국의 노력은 무관심의 벽에 부딪히곤 했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는 마치 아버지가 40세 아들에게 나가서 취직할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비꼰 사우디 평론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 미묘한 국제 정세의 변화
국제 정세의 변화도 사우디가 프로젝트를 본격화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사우디와 미국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나라는 예전부터 친한 편이었다. 1932년 미국이 신생국 사우디의 압둘아지즈 국왕을 만나 관계를 텄다. 1938년 사우디에서 첫 번째로 유정을 시추한 것도 미국인들이었다. 아람코는 ‘아라비안 아메리칸 오일 컴퍼니’(Arabian American Oil Company)의 약자다. 사우디가 이후 결제 대금을 달러로만 받으면서 미국의 달러 패권을 강화해줬고, 어깨동무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때 두 나라는 더욱더 가깝게 지냈다. 중동 이슬람 양대 종파의 맹주격인 사우디(수니파)와 이란(시아파) 사이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실어줬다. 이란의 ‘시아벨트’ 팽창을 견제하고, ‘수니벨트’ 파트너로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중재했다.
이 중재가 2020년 9월 ‘아브라함 협정’이다.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은 UAE·바레인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사우디가 협정 당사자는 아니지만, UAE 역시 수니파 무슬림 국가라는 점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확대, 이란에 대한 견제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바레인이 협정 당사국이 된 것에는 사우디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바레인의 대외 정책에는 사우디의 영향이 많이 작용한다”고 했다.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는 라이벌과 앙숙 사이에 있다. 종파도 다르고, 정치 체제도 다르다. 이란은 혁명 세력이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집권했다. 절대군주제인 사우디가 제일 겪기 싫은 상황이 중동 나라에서 펼쳐진 것.
이집트 카이로 특파원 출신의 이세형 동아일보 기자는 책 ‘중동 라이벌리즘’에서 “이란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신정 공화정을 세웠다. ‘우리도 왕정을 무너뜨리자’는 여론이 사우디에서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자는 “사우디로서는 이란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하는 게 관건”이라며 “(사우디는) 아랍 국가의 ‘적’으로 여겨져 온 이스라엘과도 협력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어 “이스라엘의 ‘아이언돔’(방어용 요격 시스템) 도입에 사우디가 관심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덧붙였다. 아람코 본사가 이란과 가까운 동부에 있는 것도 사우디에는 부담이다.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들인 이란 핵 협상을 파기하고, 가셈 솔레이미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폭격해 사살했다. 모두, 사우디가 반길만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초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반인권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국제적으로 ‘왕따’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8년 10월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받고 있다.
여기에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 숙적인 이란과 핵 협상 복원에 나서면서 사우디의 심기를 건드렸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사우디는 이란이 핵을 가지는 것보다 미국이 이란을 협상 대상으로 인정해 이란이 정상 국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더 싫어할 것”이라며 “이란 사람들이 곳곳에 돌아다니고, 지도자들이 워싱턴·런던에 가고. 이란이라는 나라가 중동에서 바이러스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 힘들어할 것”이라고 했다.
사우디는 미국이 가장 싫어할 만한 아람코의 위안화 결제 카드로 맞섰다. WSJ은 “사우디가 중국과의 석유 거래에 달러 대신 위안화로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3월 전했다.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페트로 달러’를 깰 수 있다는 사우디의 경고로 풀이된다.
그러다가 인플레이션에 발목이 잡힌 바이든 대통령이 무릎을 꿇었다. 7월 빈 살만 왕세자를 찾아가 원유 증산을 요청했다. 어색한 ‘주먹 인사’도 주고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증산 약속을 받지 못한 채 사우디를 찾았다) 사우디로서는 각국 주요 투자자들에게 네옴을 다시 알릴 외교적 숨통이 트인 셈이다. 하마터면 네옴을 잊을 뻔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밀레니얼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사우디에는 가장 신성한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 사우디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법 ‘샤리아’를 국가 기본법으로 따르고 있다. 보수적인 수니파의 ‘와하비즘’(건국이념, 이슬람 교리)이 수십 년 동안 왕국을 정의했다.
2017년 서열 1위에 오른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와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먼저, 이슬람법 준수를 일상에서 감시하는 5000여 명의 종교경찰을 거리에서 사라지게 했다. 종교경찰은 머리카락이 이슬람 여성 의복 규율을 뚫고 나온 여성의 발목과 반바지를 입은 남성의 다리를 때리곤 했다. 이 같은 일이 사라진 것이다.
대중 공연과 영화 상영도 재개했다. 2019년에는 첫 관광비자를 발급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방탄소년단(BTS) 공연을 열어 변화를 실감케 했다.
이외에 여성의 운전과 축구장 입장을 허용했고, 공공장소에서 남녀 혼석을 가능하게 했다. 태형을 없애고, 사형제 폐지 논의도 시작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세금도 걷었다. 보조금 제도를 없앤 것도 큰 변화다. 이 같은 변화는 젊은 층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버지가 왕에 오른 2016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주)와 마크 저커버그(메타 CEO)가 롤 모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이미 사우디를 바꿔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반인권적 행보에 대한 비판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17년 11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왕실 구성원들과 정·관계 인사 500여 명을 부정부패 등의 혐의로 수도 리야드의 리츠칼튼호텔에 연금했다. 이들은 거액을 헌납하고, 충성 서약을 한 뒤에야 풀려났다. 사우디의 서민들은 엘리트의 몰락을 기뻐했지만, 일련의 과정은 사법적 절차가 갖춰진 국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갱스터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이후 ‘미스터 에브리싱’이라는 별명을 얻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2020년 3월에는 사촌 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전 왕세자(당시 나이·61)와 삼촌인 아흐메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78)를 체포했다.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한 아버지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85)의 유고 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세력들에 대한 사실상의 숙청 작업이었다.
그에 대한 최악의 평가는 언론인 카슈끄지 사건에서 나온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사우디 국적으로 미 워싱턴포스트에 사우디 왕실 비판 칼럼을 게재해왔던 카슈끄지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십여 명의 사우디 정보요원들에 의해 잔악하게 고문, 살해됐다. 시신은 토막 처리되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CIA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이를 지시했다고 지목했으나, 당사자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친(親)트럼프' 성향으로 알려진 린지 그레이엄 군사위 의원은 “이건 스모킹 건이 아닌 스모킹 톱(smoking saw)”이라고 평했다. 스모킹 건은 총을 발사한 뒤 나오는 연기를 빗대 결정적 증거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카슈끄지가 토막 살해당한 것을 풍자해 스모킹 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로 날아간 이후 무함마드 왕세자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밀레니얼 중 한 명”이라고 칭했다.
낙타가 거니는 텅 빈 고속도로
네옴을 무함마드 왕세자의 권력 유지 도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남식 교수는 “왕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왕세자가 왕실 관계자들과 엘리트 계층을 견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면 민심을 사로잡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계몽주의자, 개방주의자 코스프레를 할 가능성이 큰데, 네옴시티는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 정책”이라고 평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왕의 자리에 오르면,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인 교수는 “‘절대 반지’를 쥐고 나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되면 어떤 캐릭터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기술적으로 봤을 때 2030년에 네옴이 완성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일부만 돼도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놓고 팡파르를 울릴 것”이라고 했다.
물론, 무함마드 왕세자가 서구의 문화를 수용하더라도, 서구의 민주주의적 가치까지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사우디의 앞길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사우디 왕위는 지금껏 형제 상속으로 승계돼, 하나같이 고령이 돼서야 왕에 올랐다. 현 국왕이 아들 무함마드를 왕세자로 책봉하며 형제 상속 관행을 처음 깼다.
개혁 군주를 천명한 무함마드 왕세자는 향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네옴시티는 치적 쌓기일까, 국가의 미래를 위한 담대한 비전일까. 아직은 무함마드 왕세자에게도 엄청난 도전으로 보인다. 블룸버그는 “25명 이상의 전·현직 직원과의 인터뷰와 2700쪽에 달하는 내부 문서에 따르면 프로젝트는 많은 차질로 시달리고 있다”고 7월 전했다.
이 같은 비판이 나오자 아흐메드 알-카티브 사우디 관광 장관은 “귀로만 듣지 말고 직접 와서 보라”고 했다. 그러자, 니콜라스 펠햄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직접 네옴에 갔다. 그는 7월 28일 기사에서 “그곳에서 나는 텅 빈 고속도로를 거니는 낙타와 불도저로 무너진 길들, 외국인 근로자로 가득 찬 호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고 했다.
펠햄은 “한 퇴역 공군이 600달러(약 83만 원)를 내고 도시를 둘러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나를 ‘I ♥ Neom’이라고 적힌 조각상에 데려갔다. 조금 더 가니 ‘드림 시티’의 끝을 알리는 아스팔트가 길게 뻗어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모래사막만 펼쳐져 있었다”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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