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택시 운전사 모하메드 카릴 씨는 기자가 런던에 도착한 9일(현지 시간) 택시에 올라 “버킹엄궁으로 가달라”고 하자 이같이 말했다.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는 표현은 여왕의 서거를 의미하는 영국 왕실 코드명이다. 여왕의 서거가 런던 브리지 붕괴처럼 영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란 뜻이 내포돼 있다.
현지에서 만난 영국인들은 코드명처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에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여왕을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버킹엄궁까지 온 37세 로티 씨는 “여왕이 끊임없이 결단을 내렸던 역사적 순간들과 타인을 항상 도우려 했던 선의가 기억에 남는다”며 울먹였다. 에너지난, 고물가 등 총체적 난국 속에 여왕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한 불안감도 드러냈다. 런던 지역신문 기자인 멜라니 맥도널드 씨는 기자에게 “(스캔들로) 총리가 바뀌더니 (여왕의 서거로) 국왕까지 바뀌었다. 이 모든 일이 한 주 안에 일어나 참 혼란스럽다”며 “어려운 시기라서 우린 여왕이 더욱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는 8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바위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그 위에서 현대 영국이 건설됐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96세의 나이로 8일 휴가를 보내던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서거했다. 1926년 태어나 1952년 왕좌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자 영국의 최장수 군주로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70년 재위 기간 동안 무너져가는 왕실의 중심을 바로잡고 격변의 현대사를 겸손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영국인들과 함께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난 속에 여왕마저 떠나”… 英시민들, 헌화-손편지 행렬
영국 추모 현장 르포 고물가-에너지난 총체적인 난국 “총리-왕 한주새 다 바뀌어 불안감” “마지막까지 최선, 고마웠어요” 19일 국장에 75만명 이상 모일듯
“(가진 돈으로) 난방을 해야 할지, 먹을 걸 사야 할지(heating or eating) 선택해야 할 난국에 국가의 상징인 여왕까지 떠났어요….”
9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도심에서 만난 한 30대 여성은 이렇게 말하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정부 관련 기관에서 일하기 때문에 인터뷰가 조심스럽다며 익명을 요청했다. 이어 “새 군주든 총리든 이 난국을 해결할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영국 전직 의원이었던 앤서니 쿰스 씨는 9일 버킹엄궁에 헌화를 하며 “우리는 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 여왕은 국모였기 때문”이라며 “여왕은 끝까지 많은 일을 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이른바 ‘파티 게이트’와 거짓말 논란으로 물러난 보리스 존슨 전 총리 후임으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가 6일 취임한 지 이틀 만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영국인들은 추모 열기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서거 다음 날인 이날 평일임에도 양복을 입은 직장인부터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 백발의 노년층까지 폭우를 견디며 버킹엄궁 앞에 모여들었다.
1시간이 넘도록 긴 줄을 선 뒤 추모의 뜻이 담긴 꽃과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줘 고맙다” “견고함(steadfastness)의 미덕을 보여줘 감사하다”는 손편지를 남기고 갔다. 아이와 함께 버킹엄궁에 온 로티 씨는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영국인들은 “총리와 국왕이 한 주 안에 다 바뀌었다”며 “영국이 불확실성에 내몰렸다”고 입을 모았다. 영국은 40년 만에 최고로 치솟은 물가, 에너지난으로 인한 에너지 요금 폭등 우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 가능성에 총리 교체라는 총체적 난국을 맞은 상태다. 기자와 만난 회사원 네이선 씨는 “불확실성이 커져 많은 사람들이 괴롭다”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를 안타까워하던 시민 맷 콜 씨는 “트러스 총리가 에너지난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할지 누가 알겠나”라며 “대책이 나오든 안 나오든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영국 왕실이 ‘유니콘 작전’으로 명명한 계획에 따라 11일 여왕의 관이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영국 런던을 향해 떠나며 영면을 위한 ‘마지막 여정’이 시작됐다. 여왕의 관은 12일 성자일스 대성당으로 이동해 장례 예배 후 24시간 동안 대중을 맞이한다.
특히 여왕의 참나무관이 이목을 끌었다. 밸모럴성의 꽃으로 만들어진 화환 아래 스코틀랜드 왕기로 덮인 관은 영국 왕실 협력업체가 30여 년 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은 구하기 힘든 고가의 영국산 참나무로 만들어졌고 왕실 장식을 부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관은 13일 공군기 편으로 런던 버킹엄궁으로 이동한 뒤 14일 웨스트민스터 홀로 옮겨져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공휴일로 지정된 19일 오전 11시 국장이 엄수될 예정이다. 이날 장례식엔 75만 명 넘는 인파가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12일 보도했다. 찰스 3세 국왕의 전 부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1997년 숨졌을 당시 조문객 규모와 맞먹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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