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3월 미국 반도체기업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새로운 그래픽 처리 장치(GPU) H100을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H100은 1.2GB(기가바이트) 영화 4200편을 1초 만에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반도체다. 엔비디아는 이 반도체를 4000개 넣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1초에 무려 1840경 번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다. 도로 위 온갖 상황을 즉시 파악하고 분석해야 하는 자율주행차부터 스스로 판단해 적을 공격하는 첨단 무기까지 슈퍼컴퓨팅은 미래 AI산업의 필수 기술력이다.
H100 반도체는 이달 초 미국이 중국 수출 금지령을 내려 다시 주목받았다. 미국은 이 첨단 반도체가 중국 무기에 활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수출 금지령으로 엔비디아는 약 4억 달러(약 5560억 원) 손해를 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엔비디아 전체 매출에서 중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6%가량이다.
○ 미, 中 견제 위해선 자국 기업 손해도 불사
엔비디아의 사례는 미국이 첨단 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서라면 자국 기업의 손해까지 불사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글로벌 GPU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엔비디아의 첨단 GPU에 대한 수출 통제는 중국 자율주행차 및 클라우드 서비스 개발에 타격을 준다. 중국 전기차업체 샤오펑의 허샤오펑 회장은 엔비디아 등으로부터 GPU 수입이 어려워지자 “클라우드 기반 자율주행차 테스트에 제동이 걸렸다”며 우려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전략을 강력히 추진하는 미국은 BBC(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산업에서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반도체 장비 공급을 막아 반도체 개발을 저지하고 있다. 1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 최첨단 반도체 장비만 중국 수출을 금지하던 것을 14nm 이하로 확대하는 것 역시 확실시된다.
기준이 10nm일 때에는 네덜란드 업체 ASML 장비가 주로 수출 금지 대상이 됐지만 14nm로 확장되면 미국 기업 램서치 KLA 등의 중국 매출도 사라지게 된다. 중국이 ASML 극자외선(EUV) 장비 없이 기존 노광(露光)장비로 7nm 시제품을 개발했다고 알려지자 단행한 조치다. 중국 첨단 반도체 싹을 자르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국은 또 자국 및 해외 기업들이 중국 BBC 업체들과 협력하는 것을 막아 기술 유출 우려를 차단하고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업들의 성장을 저지하려 한다. 이달 초 애플이 중국 반도체기업 YMTC로부터 낸드플래시를 공급받겠다고 하자 미 의회가 “불장난하지 말라”며 제동을 건 것이 대표적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9일 오하이오주의 200억 달러(약 28조 원)짜리 인텔 공장 건설 현장을 방문해 팻 겔싱어 인텔 CEO를 “팻”이라 부르며 연신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인텔이 ‘반도체·과학법’의 중국 투자 제한 규정을 완화해 달라고 로비를 벌일 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존 뉴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장은 최근 “미국 반도체 기업 매출의 35%는 중국에서 온다. 중국 같은 거대 시장을 잃으면 그만큼 미국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여력도 줄어든다”고 우려했다.
○ 바이든은 왜 BBC에 꽂혔나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2월 취임하자마자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핵심 광물 등 4개 분야 공급망을 향후 100일간 점검·평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서명 직전 연설에서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며 “이 행정명령은 팬데믹은 물론이고 국방과 사이버안보, 기후변화 및 다른 많은 분야에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에 미국이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 광물이 배터리와 반도체, 바이오의 소재임을 감안하면 결국 ‘BBC’ 3개 산업이 미국 안보와 경제를 책임질 산업이면서, 뒤처질 경우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BBC는 미국의 특허 및 설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제조 능력, 중국의 자원 공급이 결합된 복잡한 분업을 바탕으로 공급망이 짜여 있다.
미국의 각 정부 부처가 낸 ‘미국 공급망 점검 보고서’는 미국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과거 센카쿠 열도 관련 중일 갈등 당시 중국의 대일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희토류 가격이 폭등한 사례를 들며 중국에 대한 핵심 광물, 원자재 의존 위험성을 경고했다. 반도체는 한국과 대만에, 바이오산업은 주로 인도와 중국에 생산 시설이 몰려 있어 쏠림 현상이 심한 것도 위험 요인으로 지적됐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는 원료부터 배터리, 전기차까지 모조리 중국이 주도하는 산업이다. 미국은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3.5%(보유량 2100만 t)를 차지하고 있지만 채굴 후 가공 시설에는 투자가 미미했다. 중국은 해외 광물을 사다가 가공하는 시설에 공을 들여 세계 코발트 시장의 80%, 리튬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배터리 완제품 점유율도 중국이 압도적이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중국 배터리 완제품을 배제할 뿐 아니라 중국의 핵심 광물 사용까지 줄이도록 명시한 것은 공급망 점검 보고서의 이 같은 경고에 따른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 우려도 크다. 적국이 해킹으로 반도체 설계 공정을 악의적으로 변경하거나 미국 수출 시 반도체 모조품을 섞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내 통신망과 공장에서 반도체를 제조해야 여러 위험 요소가 줄어든다고 보는 것이다.
○ 美 “우리만 손놔서 뒤처져”
미국은 1980년대 일본에 이어 1990년대 한국, 중국, 대만이 반도체, 정보기술(IT) 제조 분야에서 부상한 배경에 각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아메리카 메이드’ 기조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미국만 손을 놓는 바람에 공급망이 취약해졌다는 정서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미 반도체협회의 뉴퍼 회장은 ‘미국이 IRA, 반도체법 등으로 각국 산업 보조금 경쟁에 불을 붙인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다른 나라는 이미 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제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미국은 자국 반도체 제조업이 서서히 침식되도록 내버려둬 왔다. 이제 다시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반도체 무역전쟁 격인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전후 미국에선 일본 경제산업성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동시에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1980년대 ‘일본과의 첨단 테크 전쟁’, ‘반도체 전쟁’ 같은 책이 줄줄이 출간되며 미 정부도 일본처럼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미일 협정에서 미국은 일본 D램 원가와 미국 수출 가격까지 미국과 합의해야 한다고 강제한 바 있다. 1990년대에도 미 반도체협회 등은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대한 반덤핑 제소와 더불어 한국 정부의 반도체 지원 문제를 제기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급성장한 미국 IBM, 애플 등 전자업체들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공급을 막지 말라며 나섰고, 2000년대 급속히 디지털 경제로 바뀌며 분업 체계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고물가 속 경기침체 우려, 신냉전으로 인한 지정학적 갈등이 확산되면서 다시 ‘아메리카 메이드’ 정책에 힘이 실리고 있다.
아메리카 메이드 정책의 대표적 사례가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IRA의 조항이다. 국내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자국 전기차 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줘가며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을 키웠다”며 “중국과 경쟁 중인 미국 입장에서 ‘우리만 모범적인 보조금 지급 규정을 지켜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에서 손해를 봤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의 지지 기반인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전기차 전환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UAW 자체 조사에 따르면 전기차 전환으로 노조원 3만5000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은 14일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찾아 IRA가 일자리를 돌려줄 것이라며 전통 산업지역의 표심을 달랬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8일 최근 3000명이 해고된 포드 공장을 방문했다. IRA 이전 버전인 ‘더 나은 재건(BBB)’ 법안에는 2027년부터 미국산 전기차에 7500달러, 미국 노조가 만든 전기차에 추가 보조금 4500달러를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당시 바이든 정부가 그만큼 노조 달래기를 의식했다는 의미다.
IRA에선 보조금 지급 대상을 미국산 전기차에서 북미산 전기차로 다소 확대하고 지난달 16일 법 통과와 동시에 보조금이 지급되도록 했다. 미국 노조가 만든 전기차에 추가 보조금을 준다는 조항은 빠졌다.
바이든 대통령이 IRA, 반도체법 등 ‘메이드 인 아메리카’ 관련 법의 성과를 연일 강조하는 것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행보로 볼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AP통신-시카고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7월 36%에서 최근 45%로 급격히 올랐다.
○ “韓 정부-기업, 美 기류 냉정히 따져야”
한국 전기차는 미국의 중국 견제 의지와 미국 내 정치 역학관계가 얽힌 IRA로 괜한 불똥을 맞았다. 당초 IRA 이전 초안에는 2027년부터 미국산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돼 있어서 현대차와 기아는 2025년부터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을 가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의회를 통과한 IRA는 대통령 서명 즉시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명시해 당장 현대차와 기아에 전기차 보조금이 끊긴 상태다.
미국의 ‘중국 견제’와 ‘아메리카 메이드’가 새로운 경제 질서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 IRA의 독소 조항을 개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많다. 자국 기업 손해도 불사하는 미국이 한국 기업 사정만 봐주긴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 같은 투자 유인책이 다른 나라들도 시행하고 있는 정책일 뿐, 기업들에 투자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인들이 ‘미국이 안전해서 미국에 투자한다’고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윌리엄 라인시 선임 고문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프렌드쇼어링’의 정의는 친한 국가에서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의미이지만 미국 정부가 가장 원하는 답은 ‘고향(미국)’으로 와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사업할 경우 발생할 정치·경제적 위험을 재평가하고 있다”며 “이 같은 재평가는 기업들이 각자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하는 것이지 미국이 먼저 요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내 재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기업과 정부가 함께 미국 의회의 움직임에 주목하며 냉정하게 투자 결정을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본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투자했으니 다 잘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버려야 한다. 미국 의회, 정부는 따로 움직이고 생각도 바뀔 수 있다”며 “냉정하게 미국의 기류를 살피며 얻을 것과 잃을 것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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