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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에너지 무기, 유럽 전역에 포격
유럽의 에너지 전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러시아는 9월 5일(현지 시간)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라인을 무기한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설비 점검 등의 핑계로 가스 밸브를 잠갔다 열기를 반복하며 간을 보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대(對)러 제재를 해제할 때까지 노르드스트림1을 폐쇄할 것”이라며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가스 쓰고 싶으면, 제재를 풀어라”는 의미다.
유럽연합(EU)에 따르면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천연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해왔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노르드스트림1을 통했다.
러시아가 에너지 공급을 조이는 사이 유럽 천연가스 도매가격은 지난해의 9배까지 치솟았다. 각국 정부가 세금을 인하하는 등 가격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공과금이 오르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유럽 가스 가격의 지표인 네덜란드 TTF는 1년간 550%로 껑충 뛰었고, 영국의 에너지 기관은 가정용 전기·가스 요금이 다음 달부터 연 3549파운드(약 563만 원)로 80% 인상될 것이라고 최근 밝혔다. 월 50만 원을 전기·가스 요금으로 내야 하는 상황. 독일의 에너지 가격도 지난해보다 2배 이상으로 뛰었다.
전기요금 고지서에 놀란 유럽인들은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 동부 그림스비에 거주하는 필립 키틀리 씨는 “은행 계좌를 보고 전기요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올여름 기록적 불볕더위에도 선풍기를 돌리지 않았다”고 로이터통신에 전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회사에서 샤워하고 퇴근한다는 직장인들의 소식이 번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에서는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버리고 있고, 폴란드인들은 겨울철 난방을 위해 쓰레기를 태우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17일 보도했다.
“장작은 새로운 금입니다”
겨울철을 앞두고, 최후의 수단인 ‘장작’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땔감용 장작 가격이 한 달 새 20% 올랐다. 아일랜드뿐만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구글에서 장작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brennholz’가 지난달 검색량이 치솟았다. 독일 가정은 절반가량이 천연가스로 난방을 하고, 장작 사용은 6% 미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에너지 가격이 껑충 뛰면서 장작을 대안으로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독일에선 목재 난로 등 관련 장비가 동나고 있다. 재고 장작이 모두 팔려, 사업자들이 폴란드에서 이를 수입해오고 있다. 트럭에서 통나무를 훔치거나, 나무 판매자인 척 사기를 치는 일도 생겼다. 장작은 단순히 나무만 베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땔감용으로 말리는 데에 대략 반년 이상이 필요하다. 워싱턴포스트는 “과거 냉전 시대 때 보험 역할을 했던 석탄과 장작 난로에서 독일인들이 먼지를 털고 있다”고 했다. 독일 브레멘에 사는 프란츠 루닝하케 씨는 “장작은 이 시대의 새로운 금”이라고 워싱턴포스트에 전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로 천연가스 가격이 8월 26일 최고치에서 40% 이상 떨어졌지만, 유럽 각국은 난방 수요가 급증하는 겨울을 걱정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겨울 난방 대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일단 최대한 아끼자는 전략이다. 독일은 겨울철 난방 온도를 19도로 제한하고, 사우나나 공공수영장 온도를 현재보다 5도 이상 낮추는 방안을 병행하기로 했다. 스페인도 공공기관과 쇼핑몰, 기차역, 영화관 등에서 난방 온도를 19도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는 이달 말 에펠탑 등 주요 건축물의 조명을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끄기로 했다. ‘사우나의 나라’ 핀란드는 사우나를 1주일에 한 번만 하자는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펼친다. 이 캠페인은 1970년 오일쇼크 이후 52년 만에 등장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4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우리는 제재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수개월간 쉽지 않을 것이다. 가계도, 기업도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이야기다.
100년 만에 고개 숙인 ‘핑크 코끼리’
유럽 기업들은 에너지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스를 대량으로 쓰는 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157년 역사의 세계 최대 화학기업인 독일의 바스프가 생산 중단 위기에 처했다. 영국 가디언은 15일 “바스프가 가스 공급 부족으로 통합 생산 시스템(페어분트)이 연쇄적으로 멈출 수 있다”고 보도했다. 바스프는 치약과 기저귀, 비타민, 절연재 등 생필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물질을 생산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주 루트비히스하펜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축구장 1400개에 달하는 10㎢ 규모를 자랑한다. 2850㎞에 달하는 길이의 파이프가 125개 생산시설을 그물처럼 연결하고 있다. 파이프라인들이 생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을 원료로 여러 제품을 생산해 원자재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이 페어분트의 핵심 기술이다. 루트비히스하펜 공장의 연간 가스 사용량은 스위스 전체와 맞먹는다.
다니엘 레헨베르거 바스프 대변인은 “우리가 최대로 필요한 양의 50% 이하로 가스를 계속 받으면 사업장 전체를 점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며 “바스프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지만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천연가스를 직접 쓰지 않아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핑크 코끼리’가 상징인 벨기에 맥주, 델리리움 트레멘스의 양조 업체 ‘허이헤 브루어리’는 액화 탄산가스 가격이 13배나 급등해 100년여 만에 처음으로 공장을 닫을지 고민 중이다. 액화 탄산가스는 이산화탄소(CO2) 가스를 액화시킨 제품으로 맥주, 탄산음료 식품첨가제로 쓰인다.
블룸버그는 “벨기에 양조장의 불행은 유럽 경제가 얼마나 서로 연결돼 있는지 보여주는 일련의 불행이 합쳐진 결과”라고 전했다.
천연가스를 많이 쓰는 노르웨이 비료 회사 야라 인터내셔널이 네덜란드 공장에서 암모니아 생산을 중단하자, 원료를 공급받던 산업 가스 기업 닛폰가스가 한 방 얻어맞았다. 비료 생산의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재료 물량이 줄어든 닛폰가스는 생산 비용이 늘어나자 액화 탄산가스를 공급하던 허이헤 브루어리에 가격 인상을 요구했다. 닛폰가스는 1톤당 250유로(약 35만 원)였던 가격을 3350유로(약 467만 원)까지 올렸다.
크리샨 모드갈 벨기에 양조업협회장은 “두 달 전만 해도 업계는 스위스 시계처럼 작동했다”며 도미노 현상을 당황스러워했다.
세계를 샅샅이 뒤진 유럽
사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천연가스 재고 부족 등 에너지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팬데믹(대유행) 이후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러시아 가스 이외에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를 추가로 구매해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터지자 조급해졌다. LNG는 천연가스가 영하 162도로 냉각되면서 생성되는 액체로, 천연가스 부피를 600배가량 압축해 배송한다. 냉각과 운반에 비용이 들어 그간 에너지 시장에서 10% 초반의 점유율을 그치는 등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유럽은 가스가 풍부한 미국이나 카타르에 다시 ‘SOS’를 쳤다. 벨기에는 올해 미국에서 지난해보다 658% 많은 LNG를 수입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도 전년 대비 200% 이상 수입량을 늘렸다. 독일은 노르웨이와 네덜란드에서 가스 구매를 확대했다. LNG 운반선들의 움직임을 두고, ‘LNG 함대’가 유럽으로 향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7일 “유럽의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대체하기 위해 알제리부터 카타르, 세네갈, 콩고, 캐나다 등 전 세계를 누볐다”고 했다.
친환경 시대를 앞장서 온 독일 등은 체면을 구겼다. 급한 마음에 석탄에 손을 더 댔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독일의 총 전력 생산량(263.2kWh)의 31.4%(82.6kWh)가 석탄 화력 발전으로 생산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70.5kWh)보다 17.2% 증가한 것이다. 통계청은 특히 2분기(4~6월)에 가스 발전이 석탄으로 크게 전환됐다고 밝혔다. 2분기에 석탄 화력 발전량은 지난해보다 23.5% 늘어 총발전량의 31.3%를 차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그리스, 체코 등이 석탄 발전소의 생산량을 늘리거나 광산 운영을 허용했다”고 6일 전했다.
석탄 이외에도 전기를 구하기 위해 총동원하는 모양새다. 독일과 프랑스는 전기와 가스를 나눠 쓰기로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화상 회담 이후 “두 나라는 에너지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전기와 가스를 함께 나누어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는 독일에 가스를, 독일은 프랑스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이다. 조만간 독일에 가스를 보내기 위한 준비도 완료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거의 ‘아나바다’ 수준이다.
올해 연말까지 완전한 탈원전을 계획했던 독일은 남은 원전 3곳의 가동을 추가 연장하지는 않기로 했지만, 2023년 4월 중순까지 원전 2곳을 예비전력원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유럽의 운명은 날씨에 달렸다
각국 정상들이 발에 땀이 나게 뛴 덕분에 유럽연합(EU)이 수입하는 가스 중 러시아산의 비중은 9%로 떨어진 상태다. 40%에서 한참을 줄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U의 천연가스 재고는 83.6%에 이른다. 애초 설정한 목표치 80%를 넘겼다. 유럽이 올해 겨울을 넘길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낙관할 때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먼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점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2월 24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겨울을 겪어보기 전에는 전력 수급 사정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내년에 가스 창고를 채울 때는 러시아에 전혀 기댈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정말 불가능해 보이지만) 서로 악수를 하며 전쟁이 당장 끝나더라도, 서방이 곧바로 제재를 풀어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럽은 올해 러시아가 밸브를 최종적으로 잠그기 전까지 반년 이상을 러시아에서 가스를 받아왔다. 내년에는 러시아에 기대지 않고 창고를 채워 나가야 한다.
올해 뜻밖의 수혜도 있었다. 중국이다. 세계 최대의 LNG 수입국인 중국은 올해 8월까지 LNG 수입이 지난해 같은 기간의 20%로 줄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가 영향을 미쳤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의 줄어든 수입 물량은 영국의 연간 LNG 수입량과 같다”라며 “중국의 봉쇄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여행도 상당히 줄였다”고 15일 전했다. 중국의 봉쇄가 풀리거나 추워지면 수요가 늘 수 있다는 의미다.
원자재 정보업체 케이플러의 로라 페이지는 “날씨가 예상외로 추워지면 중국이 LNG 시장에 복귀할 수 있다. 유럽에서 꼭 필요한 LNG를 뺏어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유럽이 천연가스 부족에서 버티느냐는 겨울 날씨에 달려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 내 수요도 증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 코모디티 인사이츠는 기온이 1도씩 올라갈수록 독일과 영국의 겨울철 가스 수요를 6% 감소시킬 수 있다고 봤다. 반대로, 예상외의 강추위가 들이닥치면 평소보다 가스 수요가 5% 이상 늘어날 수 있다.
물론, 기온이 높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가뭄이 심해질 수 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 “일부 유럽 지역이 5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다”며 “비가 내리지 않아 수력 발전이 지난해보다 20% 줄었다”고 했다. 정말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독일은 어쩌다가 러시아의 ‘가스 인질’이 됐을까?
가스 재고를 채운 유럽은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 중이다. 독일은 650억 달러(약 90조7000억 원)의 에너지 구호 조치를 최근 발표했고, 프랑스는 최악의 경우 에너지 배급제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영국도 1000억 파운드(약 158조2000억 원)를 에너지 위기 대응 예산으로 책정했다.
전쟁이 확산하는 동안 유럽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동안 무엇을 믿고 러시아에 이렇게까지 의존했느냐는 지적이다. 특히, 해외 언론들은 경제 규모가 큰 ‘유럽의 맏형’ 독일을 조준 사격했다. 독일의 천연가스 수요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년 전 30%에서 전쟁 이전 55%까지 꾸준히 늘었다.
이코노미스트는 7월 21일 ‘독일인들은 꿈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에너지 정책은 환상이었다’는 기사에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 나라는 잠이 덜 깬 상태가 아니라 몽유병 상태에 빠져있었다”며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배출 가스를 전혀 내보내지 않는 영원한 번영(친환경) 같은 도취 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고 비꼬았다.
독일이 처음 러시아에 에너지 공급을 기대게 된 데에는 가스보다 일자리에 있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천연가스의 가치를 깨달은 소련은 1980년대 초반 서독 등 유럽에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낸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유럽을 소련의 에너지에 의존하게 만들고, 소련에 무기를 살 수 있는 돈을 안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상황을 40년 전에 이미 꿰뚫어 본 듯하다.
하지만 서독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실업률이 1980년 5.9%에서 2년 동안 8.7%까지 오르면서 유럽은 프로젝트에 손을 내밀었다. NYT는 1982년 5월 30일 자 기사에서 “이 거래는 독일 대형 철강업체에 2500명의 일자리가 걸려 있다. 이탈리아의 산업용 펌프 제조업체는 ‘6000명의 직원에게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NYT는 “유럽인의 눈에 소련은 가스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공급을 중단한 알제리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처럼 보였다”고 언급했다.
● 트럼프 “독일이 포로로 잡혀있다”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이 유럽에 거미줄을 촘촘하게 완성하는 동안 미국이 본격적으로 LNG 수출을 늘리면서 유럽도 공급망을 다변화하기는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2019년 동맹국에 LNG 추가 수출을 승인했을 때 “미국의 ‘자유의 분자(molecules of U.S. freedom)’를 공급했다”고 자랑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지만, 유럽의 러시아 의존도가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가격 때문이다. 미국 LNG 수출업체는 유럽에서 1mBTU(물 100만파운드 온도를 표준기압하에서 화씨 1도만큼 올릴 수 있는 열량)당 최소 6~7달러는 받아야 한다. 가스를 얼려서 옮긴 뒤 다시 기체로 만드는 비용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는 1mBTU당 5달러에 공급할 수 있다. 특히, 미국 LNG는 카타르나 아프리카 국가 가스보다도 비싸다. 가스 추출 비용이 높고, 거리도 멀기 때문이다. 원자재 가격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럽의 선택도 이해는 간다.
결국, 유럽은 터미널 등 LNG 쓸 수 있는 설비를 대폭 늘리는 대신, 러시아의 공급에 기대는 편을 택했다. 러시아는 이를 잘 이용했다. 2018년 러시아가 기획한 노르드스트림2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1230㎞ 길이 해저 가스관이다. 노르드스트림2가 완공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우회해 독일 등 서유럽으로 더 많은 천연가스를 운송할 수 있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부터 기존 설치된 가스관을 열었다 닫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등에 에너지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노르드스트림2로 독일이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고 비난했다. (이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에서는 ‘독일이 가스가 어디서 오는지 이해했다’며 달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對)유럽 수출관은 7개다.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소유즈’, ‘우렌고이 포마리 우즈고로드’와 소련 해체 이후 설치한 ‘야말 유럽’, ‘블루스트림’, ‘터키스트림’, ‘노르드스트림1·2’ 등이 있다.
자책골과 탈원전
이코노미스트는 7월말 과거 독일의 또 다른 치명적인 실수를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은 2000년 초반에 연 200억 ㎥의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었다. 연 수요의 25%에 해당하는 큰 규모다. 지질학자들은 독일이 연 800억 ㎥까지 생산할 수 있는 가스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생산량은 5억~6억 ㎥까지 추락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연가스 추출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가스 추출에 쓰이는 ‘수압 파쇄(프래킹)’ 기법은 강한 수압으로 바위층을 뚫어 셰일석유나 천연가스를 시추하는 공법이다. 물이나 모레, 첨가제 등의 혼합물을 고압으로 땅에 밀어 넣어 암석에 형성된 가스에 접근하도록 만든다.
이 같은 채굴 방식이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2017년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프래킹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당시 독일 정부 자문기구 전 책임자는 “프래킹이 안전하다는 설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천연가스 포기는) 독일의 가장 큰 자책골”이라며 “독일인들은 동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회의에서 “프래킹은 부엌 수도꼭지에서 검은 덩어리를 뿜어낸다”며 열심히 거들기도 했다.
‘환경 염려증’은 원전도 감염시켰다. 독일은 핵산업 수출시장에서 나름 잘나갔다. 1950년대 미국에서 들여온 기술을 발전시켜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 스위스 등으로 되팔았다.
그러다가 1973년 프라이부르크 인근 빌(Wyhl) 지역에 원전을 짓기로 했는데, 건설 예정지를 포도 재배 농민들이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방사선 피폭보다 냉각탑에서 나오는 기후 변화를 걱정했다. 이 시위는 건설 허가 취소판결로 이어지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1998년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녹색당이 원전 폐쇄를 연정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독일은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게 됐다.
2010년 이공계 출신(양자역학 전공한 물리학 박사)의 메르켈 총리는 원전 17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1년 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준공된 지 30년 넘은 노후 원전 8기는 폐쇄하고, 나머지 9기는 올해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2010년 독일의 한 콘퍼런스에서도 푸틴이 등장한다. 그는 “원자력도 싫고 러시아 가스도 싫으면 장작을 때려는 것이냐. 정작, 장작 땔 나무도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사 와야 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푸틴과 에너지 신(新)냉전
러시아는 매일 대량의 천연가스를 불태워버리고 있다. BBC방송은 지난달 26일 러시아 북서부 LNG 발전소에서 가스 연소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화염이 잇달아 목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가스 연소 규모가 하루 1000만 달러(약 140억 원)어치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위성 데이터 전문가인 제시카 매카트니 미 마이애미대 부교수는 BBC에 “LNG 발전소에서 이렇게 많은 화염이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중국과의 거래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에서 에너지 문제를 담당하는 알렉산드르 노박 부총리는 15일 “조만간 중국과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에 대한 최종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며 “러시아에 중국 시장은 아주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중국 동북 지역을 연결하는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으로 중국에 가스를 보내고 있었는데,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수출량을 늘리겠다는 심산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14일 “20년 동안 중국의 에너지 정책 중 확고한 원칙 중 하나는 공급망 다각화였다”며 “베이징은 현재 유럽의 고통이 (에너지를) 싸게 살 기회와 과잉 의존에 대한 경고로 볼 것”이라고 꼬집었다. NYT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13일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를 유럽의 에너지 황제에서 중국의 에너지 식민지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국의 동상이몽에 배팅하고 있다.
어찌 됐든, 당장은 유럽이 걱정이다. 블룸버그는 “노르드스트림1을 폐쇄한 러시아의 결정은 500억 유로(약 69조7000억 원)의 가스 비용을 유럽에 증가시킬 것이다. 이는 가격 상승에 따른 4600억 유로(약 641조 원)와 별개”라고 했다. 유럽의 에너지 문제가 올해 유럽의 국내총생산(GDP)에 2.2%가량의 타격을 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경기침체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각국 정부의 대책들 역시 재정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유럽은 현기증 나는 이 에너지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겨울이 오기도 전부터 유럽이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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