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로벌 경제 핫이슈는 물가이죠. 미국 소비자물가지수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40년 만에 최고”라며 난리인데요.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도대체 40년 전엔 어땠길래? 독자님들 중에도 40년 전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그래서 40년 전, 정확히는 1970년대와 1980, 81년까지 미국의 ‘대(大) 인플레이션 시대’를 알아봤습니다. 또 요즘 많이 소환되는 인물이죠.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었던 폴 볼커(1979~1987년 재임) 이야기도 함께 들여다 볼게요.
코로나보다 무서웠던 인플레
‘홀수 번호판 차량은 홀수 날짜, 짝수 번호판은 짝수 날짜에만 기름을 살 수 있었지. 기름이 부족해서 미국 주유소 20%가 문을 닫았어.’
‘가격이 너무 빨리 올라서 식료품점 선반 물건마다 라벨이 여러 개 겹쳐 붙어있었지. 기존 라벨을 떼고 다시 붙이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새 라벨을 그냥 위에 붙여놓은 거야.’
‘우리 부모님은 이자율 연 14%짜리 국채를 샀어.’
‘1962년생인데 어릴 때 나는 모든 것의 가격이 매년 10%씩 오른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였어. 그게 정상인 줄 알았지.’
‘식품 가격이 1년 만에 두배로 올랐고 고기는 미친 듯이 비쌌지만, 최악은? 대출금리!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20%를 넘었어.’
미국의 지식 공유 플랫폼 ‘쿼라(Quora)’에서 ‘인플레가 심했던 1970년대 미국 생활은 어땠어?’라는 질문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답변들입니다. 1950~60년대에 태어난 미국인들에겐 70년대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요. 지금의 10대, 20대가 ‘코로나’를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전 같으면 장년층의 ‘라떼’ 얘기로 치부했겠지만, 지금 시점엔 상당히 실감나는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미국 소비자물가상승률이 8%대, 근원물가(변동이 심한 에너지와 식료품값을 뺀 나머지 물가) 상승률이 6%대로 치솟았는데요.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40년 만에 최고(또는 최악)’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40년 전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느끼게 하는 데는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 그래프만 봐도 아찔하니까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인데요. 1974년 11% 넘게 오르며 피크를 찍은 뒤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물가상승률이 1970년대 후반 다시 무섭게 오르더니 1980년 무려 13.5%를 기록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플레이션’이었죠. 전쟁이 아닌데 이렇게 물가가 치솟은 건 미국 역사상 처음이었던 것. 무시무시하죠.
참고로 1980년 한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였는데요. 정말 악소리가 날 정도였죠. 당시 아시아 국가 중 최고였다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가가 급등한 데다(국내 석유가격 상승률 105%), 농산물 흉작까지 겹쳤던 해입니다.
1970년대 물가는 왜 치솟았나
그럼 1970년대(그리고 1980년대 초반) 미국은 왜 그렇게 물가가 치솟았을까요? 그 이유로 꼽을 만한 게 너무나 많긴 하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몇가지를 간추려봤습니다.
①베트남 전쟁과 달러의 추락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엄청난 전쟁비용을 지출했습니다. 당시엔 금본위제(통화가치가 순금 중량과 연계)여서 ‘금 1온스=35 미국 달러’였거든요. 따라서 미국 연준은 자기네가 보유한 금 중량만큼만 달러를 발행하는 게 맞는데요. 돈이 부족하자 달러 보유량을 초과해서 그냥 마구 달러를 찍어냈습니다.
당연히 시장에선 ‘정말 미국이 금 돌려줄 능력 있는 것 맞아?’라는 의심이 나왔고요. 각국이 미국에 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다급해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미국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는다’라고 배째라식 선언을 하며 전 세계를 뒤흔들어 버립니다(닉슨쇼크).
당시엔 가뜩이나 미국이 유럽, 일본과 수출 경쟁에 치이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나던 시기. 이후 미국 달러화 가치는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약달러로 미국 수입물가는 치솟을 수밖에 없었죠. (지금의 ‘킹달러’ 현상과는 사뭇 달른 상황.)
②단순무식한 물가 통제
닉슨 대통령이 ‘달러-금 교환 중단’만 한 게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가격통제’를 발표했는데요. 미국 내 모든 임금과 물가를 90일 동안 동결해버렸습니다. 이후에도 정부 위원회가 가격의 상한선을 정해놓는, 과격한 가격 통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물가가 잡혔을까요? 처음엔 그런 걸로 보였죠. 1970년 5%대였던 물가상승률이 1972년 3% 수준으로 떨어졌으니까요. 72년 닉슨은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문제는 1973년 1월 가격통제를 풀자 물가가 미친 듯이 뛰었다는 겁니다. 쇠고기 값이 무섭게 뛰자 주부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육류 불매운동’을 벌일 정도였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다시 ‘육류가격 상한제’를 꺼내들었지만 목장주들이 버티고 도축을 미루면서 오히려 마트 선반에서 고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가격 통제로는 물가를 못 잡고 더 뛰게 만든다’는 교훈만 남겼죠. ③오일쇼크 (1차 1973년, 2차 1979년)
교과서에서 보신 기억 나시죠? 중동전쟁에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중동 산유국들이 그 보복으로 석유 공급을 확 줄이고 미국과 동맹국에 석유수출을 중단하면서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는데요. 당시 유가는 두달 만에 4배로(배럴당 2.8달러→11달러) 뛰며 전 세계 경제가 난리가 났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주유 홀짝제’가 그때 시행됐죠. 이후 1979년 이란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또 2차 오일쇼크(2년 동안 배럴당 12.7달러→42달러) 발생.
그런데요. 전쟁으로 공급 측면에 문제가 생기면서 에너지 가격이 치솟는 현상. 지금과 좀 많이 비슷하지 않나요.
다만 1970년대 유가급등이 미국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지금이야 미국 경제에서 IT나 서비스처럼 유가와 별 관련 없는 산업이 주를 이루지만, 당시엔 훨씬 더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였으니까요. 참고로 미국은 2010년대 ‘셰일혁명(퇴적암인 셰일 지층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뽑아냄)’을 거치며 세계 1위 산유국이 되었습니다(2위는 러시아). 현재의 미국은 에너지 충격의 여파가 덜하긴 합니다. (지금은 유럽이 더 큰일)
④10% 물가상승률이 당연해지다
1970년대 내내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생긴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모두가 물가가 뛰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게 됐다는 겁니다. 딱딱한 표현으로 바꾸면 ‘인플레 기대심리 고착화’라 할 수 있죠.
물가가 계속 무섭게 뛴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노동자들이 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며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겠죠. 40년 전 미국이 그랬습니다. 1979년 미국 대기업이 노조와 합의한 평균 임금인상률이 10.2%였다고 합니다. 기업이 그걸 감당할 수 있냐고요? 어차피 경쟁업체도 똑같이 올릴 게 뻔하니까 받아들인 거죠. ‘다들 가격을 올릴 테니 나도 올린다’는 식. 인플레이션이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플레 기대심리가 한번 뿌리 박히면 악순환이 형성돼 깨기가 엄청 어렵습니다. 심리를 교정하려면 와장창 깨부수는 고강도 충격 요법이 필요했는데요. 바로 그걸 해낸 인물이 폴 볼커입니다.
폴 볼커의 고집이 통하기까지
1979년 물가상승률은 11%가 넘었습니다. 그해 10월 6일, 취임한 지 두달 된 폴 볼커 미국 연준의장이 이례적으로 토요일 저녁 기자회견을 열었죠.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4% 올린다(11.5→15.5%)고 발표한 겁니다. 이른바 ‘토요일 밤의 학살’입니다.
당장 은행 대출금리가 연 18%로 급등하고 집값이 폭락했습니다. 기업이 파산하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경제가 이런데 대통령이라고 남아 나겠어요. 이듬해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게 볼커의 통화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도 물가는 안 잡혔습니다. 그러자 연준은 주저없이 1981년 6월 기준금리를 20%까지 다시 올렸죠. 정말 난리가 났습니다. 1982년 실업률이 1930년 대공황 이후 최고인 10.8%로 치솟았죠. 화가 난 자동차 세일즈맨들은 너 때문에 차가 안 팔린다며 차 열쇠를 볼커에게 우편으로 보냈고, 열 받은 주택 건설업자들은 집 살 사람이 없다며 목재를 연준에 보냈습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타고 워싱턴 DC로 상경해 연준 본부를 둘러쌌고요. 오죽하면 볼커 의장이 살해위협 때문에 권총을 차고 다녔다는데요. 이렇게 될 걸 볼커가 몰랐을까요. 다 알면서 금리를 올린 거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의도한 경기침체였죠. 볼커는 1980년 미국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경제의 많은 부문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특히 (기업의) 파산은 고통스럽다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제하려 한다면 인플레이션이 더 심해질 거고, 그건 더 큰 문제입니다.”
혹독한 긴축은 결국 효과를 발휘했죠. 미국 물가상승률은 1982년 6.1%, 1983년 3.2%로 떨어졌습니다.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이 드디어 잡히고 경제와 증시는 다시 빠르게 살아났습니다. 무엇보다 이후 아주 장기간, 그러니까 지난해까지 무려 40년 동안 미국 경제가 물가 걱정을 잊고 살게 됐습니다. 2019년 볼커가 사망했을 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그는 키가 큰 만큼(201㎝) 고집스러웠다.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정치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옳은 일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죠.
요즘 미국 물가가 뛰면서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이 자꾸 1970년대 얘기를 꺼내는데요. 이 때문에 ‘파월이 제2의 볼커 같은 인플레 파이터가 될까’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옵니다. 40년 전과 지금은 같은 듯하면서도(공급측면의 물가 충격 + 연준이 경기보다 물가 안정에 초점), 다른 점이 많긴 합니다(강달러+ 아직 기대인플레이션율 낮음). 아직은 살짝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고는 있습니다만(1970년대와는 다르다!) 워낙 그동안 전문가들의 분석이라는 게 수도 없이 바뀌어 왔습니다.
볼커 시대는 투자자에게도 가르침을 남깁니다. 당장 모든 투자를 중단하고 도망가라는 거냐고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엄청난 변동성 때문에 웬만해선 투자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시기였던 건 맞죠. 예컨대 금 가격은 1979~80년 5개월 만에 200% 넘게 폭등했지만(282→852달러) 이후 28년 동안 800달러 선을 못 넘었죠. S&P500지수는 20개월 동안(1980년 11월~1982년 8월) -27%를 기록했지만, 이후 반등해서 1987년 8월까지 200% 넘게 올랐고요. 만약 1981년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를 샀다면? 연 무려 15.19%의 수익률을 30년 동안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시기에 타이밍을 잘 맞춰 투자했다면 대박을 거뒀겠지만, 만약 거꾸로 갔다면 지옥을 맛봤을 수도 있는 건데요. 그래서 제프 소머 뉴욕타임스 에디터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단기 투자는 위험한 게임이다. 아무도 (타이밍은) 모른다. 하지만 주식과 채권에 장기투자하는 건 시장 혼란의 시대에도 성과를 거뒀다.” By.딥다이브
40년 전 미국의 인플레 시대가 좀 와닿으시나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 시기를 20대 때 보냈기 때문에(1971년 프린스턴대 입학) 아마 어제 일처럼 생생할 겁니다. 우리도 과거를 알아둬야 할 이유이죠. 주요 내용을 간추려 드리자면
1970년대 미국은 약달러와 오일쇼크가 겹치면서 오랫동안 높은 물가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계속 높은 물가가 유지될 거란 기대심리도 강했죠.
이를 깨기 위해 당시 폴 볼커 연준 의장은 무자비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섭니다. 기업이 망하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은 뒤에 결국 인플레이션은 잡혔습니다.
40년 전 상황이 혹시 재현되냐고요? 아니길 빌지만, 금융시장의 변동성엔 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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