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군사적으로 전쟁의 승리를 쟁취할 수 없으며, 올겨울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할 기회가 올 것이다.”
미군 서열 1위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의 이 발언이 파장을 낳고 있다고 14일(현지시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보도했다.
러시아의 헤르손 철군,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요충지 수복으로 승전 기대가 부푼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발언으로 우크라 측은 화가 났으며, 미 측은 그런 우크라이나를 달래고 있다고 양국 당국자들은 인용해 전했다.
밀리 의장은 러시아의 헤르손 철군 가능성이 불거지던 지난주부터 미묘한 발언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9일 러시아가 헤르손 철군 선언을 한 직후에도 “실현되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평화협상의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틀 만에 완전 철군을 발표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직접 헤르손 수복을 선언하자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승전 기대감이 높아진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의 불안 요인은 밀리 의장의 발언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이번 11·8 중간선거 결과 하원 다수당 지위는 공화당으로 넘어갈 것이 유력한데, 공화당은 대우크라 군사 원조를 삭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9개월째 이어진 전쟁으로 서방의 무기 비축량이 부족해졌다는 관측도 나온 터다.
이런 가운데 이날 튀르키예에서 미·러 정보 수장이 비공개 회담을 가진 점도 모종의 협상 합의 가능성을 시사해 주목받고 있다.
이에 미 백악관은 익명의 고위 당국자 발로 “어떤 종류의 협상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논의하는 게 아니다”면서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러시아에 억류된 미국인 사례를 제기하고 핵무기 사용 위험성을 전할 것”이라는 설명을 외신에 전하며 수습을 시도 중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러시아와의 평화회담 관련 우크라이나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할지를 두고 공개·비공개 메시지가 혼재돼 미-우크라 간 긴장이 있다고 8명의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폴리티코는 전했다.
실제로 미 당국자들 가운데에는 올겨울 외교적 대화를 위한 기회가 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의 권고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고위 참모진의 견해를 바꾼 건 아니라고 3명의 미·우크라 측 당국자들을 인용해 폴리티코는 부연했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밀리 의장의 평가와 다소 엇갈린다.
벤 하지스 전 나토 사령관은 “겨울엔 전투 속도가 둔화해도 우크라이나군은 장비가 부족한 러시아군을 계속 압박할 것”이라며 “1월이면 우크라이나군이 크림반도 진격을 시작할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림반도는 2014년 러시아가 불법 병합한 우크라이나 영토로, 이번 전세 역전에 힘입어 아예 크림 탈환까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여러차례 밝혀온 이번 전쟁 관련 우크라이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스 전 사령관은 “내년 여름이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크림 포함) 자국 영토 전체에서 몰아낼 것으로 예상한다”며 “우크라이나는 돌이킬 수 없는 추진력을 갖고 있다. 이제는 페달을 밟을 때”라고 강조했다.
밀리 의장의 견해와 달리,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밀리 의장 발언 이후 미 행정부 내에서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다만 ‘우크라이나의 승전이 군사적으로는 달성될 수 없으니 다른 수단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밀리 의장의 발언이 “우크라이나가 주권 영토 일부를 러시아에 할양하거나 항복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한 미 당국자의 언급을 폴리티코는 소개했다.
사브리나 싱 펜타곤(미 국방부) 대변인은 밀리 의장의 발언 관련 질문에 “자기가 직접 말하겠다는 것”으로 본다고 해명했다.
싱 대변인은 “대통령도 장관도 이번 전쟁의 끝은 외교적 대화를 통해서 이뤄질 것이라고 말해왔다”며 “그렇지만 러시아는 양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 보이며 전장에서 침략을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펜타곤 당국자들은 우크라이나가 드니프로강 서안을 차지해 헤르손을 수복하긴 했어도, 강 동쪽까지 진격하는 건 더 어려운 군사작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이 때문에 결국은 평화협상이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관련해 한 당국자는 “또 다른 10만 명의 목숨을 나락으로 던지기 전 평화회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미 국무부 역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궁극적인 평화 회담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 또 다른 미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해 폴리티코는 덧붙였다. 물론 우크라이나 측과의 완전한 협의가 그 전제라고도 강조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지난 12일 언론에 “러시아가 무력으로 원하는 만큼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러시아를 선의의 협상 상대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이는 전후관계가 분명, 밀리 의장의 발언이 우크라이나에서 파장을 일으킨 뒤 NSC가 현 시점에서 평화회담 관련 선을 긋는 쪽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폴리티코는 설명했다.
또 다른 미 당국자는 “백악관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미묘한 말을 폴리티코에 흘렸다.
그는 “밀리 의장은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기꺼이 말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밀리 의장의 발언이 오히려 백악관 관리들의 솔직한 생각일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은 백악관에서 실시간으로 논의 중인 사안이라고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는 전했다고 한다.
평화회담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진 않더라도, 미 행정부가 우크라이나를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일은 없으며, 협상 전략이나 문서도 없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취재를 종합한 뒤 폴리티코는 “우크라이나에는 잔인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워싱턴에는 엇갈린 메시지가 오가고 있다”고 평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의 전기와 난방, 물, 생필품 공급을 차단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는 남부 도시에 남은 7만5000 주민에게 이를 공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미국은 일단 우크라이나의 민간 기반 시설을 보호할 탄약과 방공망 공급을 위해 애쓰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사용됐던 단거리 무기 ‘어벤저’ 4기와 체코의 호크 미사일 등을 구하는 한편 한국 방산업체에서 탄약을 구매해 우크라이나로 이전하려 한다는 미 관계부처 발표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