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카타르 도하는 일본 축구 대표팀에 ‘비극의 땅’이었다. 1993년 10월 28일 도하의 알 아흘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종료 20초 전 움란 자파르(56)에게 헤더 동점골을 내주면서 2-2로 비겼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 경기 전까지 최종 예선 1위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1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한국에도 골 득실에서 뒤지면서 두 장뿐이던 본선행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이 경기에 선발 미드필더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던 모리야스 하지메 현 일본 감독(54)은 “월드컵 본선 진출에 나의 꿈을 걸었었다. 움켜쥐었던 꿈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당시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를 한 번도 밟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도하는 모리야스 감독뿐 아니라 일본 축구에도 ‘환희의 땅’이 됐다. 일본은 23일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E조 1차전에서 독일에 2-1 역전승을 거뒀다.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 5승 5무 11패를 기록한 일본이 본선 무대에서 역전승을 거둔 것도, 역대 월드컵 우승팀을 물리친 것도 이 경기가 처음이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축구를 하는 동안 ‘29년 전 도하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강해졌다. 카타르의 비극을 환희로 바꾸고 싶다”던 모리야스 감독은 이날 승리 후 “역사적인 승리다. 일본 축구의 수준은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2003년 은퇴 후 코치 생활을 하던 모리야스 감독은 2005년 18세 이하 일본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히로시마에서 J리그 최우수감독상을 세 차례(2012, 2013, 2015년) 수상하며 명장 반열에 올라섰고 2017년 올림픽대표팀 감독에 취임한 데 이어 2018년부터 A대표팀 사령탑을 맡고 있다
다시마 고조 일본축구협회장은 모리야스 감독을 선임하면서 “일본의 장점을 살려 일본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시아에서 이번 대회에 참가한 5개국 중 자국인 감독을 선임한 건 일본뿐이다.
모리야스 감독은 이날 0-1로 끌려가던 하프타임 때 “끝까지 한 팀으로 끈질기게 싸운다면 이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선수들을 독려한 뒤 ‘깜짝 3백 카드’를 꺼내들었다. 미드필더 구보 다케후사(21·레알 소시에다드) 대신 수비수 도미야스 다케히로(24·아스널)를 투입해 추가 실점을 최소화하는 전술이었다. 일본 대표팀은 경기 나흘 전부터 훈련을 비공개로 돌리며 이 작전을 집중 훈련했다.
전반에 볼 점유율이 17%에 불과했던 일본은 후반 들어 31%까지 끌어올리며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도안 리쓰(24·프라이부르크), 아사노 다쿠마(28·보훔)가 교체 선수로 들어가 후반 30분 이후 연속 골을 넣으면서 결국 ‘도하의 기적’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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