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사상 가장 긴 기간 대표팀을 지도했다. 포르투갈 출신 파울루 벤투 감독(53). 12년 만의 방문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뤄냈고, ‘빌드업 축구’를 전수했지만 떠나기로 했다.
벤투 감독은 브라질과의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을 마친 6일 “4년 4개월 동안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훈련해왔고, 대회 때도 잘해줘 자랑스럽다”며 “한국 대표팀 감독은 오늘로 마무리한다”고 밝혔다. 이번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꺾는 등 세계적인 강호들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국내 축구 팬들로부터 ‘벤버지’(벤투+아버지)라는 애칭까지 얻게 된 그는 “이제는 미래를 생각할 때다. 향후 거취는 쉬면서 고민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한축구협회와 감독직 연장 여부를 놓고 재협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일각의 관측에 대해 이날 확실히 선을 그었다. 벤투 감독은 2018년 8월 한국 사령탑에 오른 뒤 35승 13무 9패(승률 61.4%)의 성적을 남기고 떠나게 됐다.
벤투 감독은 한국 축구에 후방에서부터 패스를 통해 점유율을 높여가는 ‘빌드업 축구’를 남겼다. 2018년 러시아 대회에서 독일을 2-0으로 이기는 성과를 보여줬지만 수비에 치중한 채 역습만 노리는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는 향후 월드컵에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하긴 힘들다는 판단에서 시도한 것이다. 오랜 단련 기간을 거친 한국은 실제 이번 월드컵에서 높은 점유율을 가져가는 축구를 구사했다. 스포츠 전문 통계 회사 옵타에 따르면 한국의 이번 대회 평균 점유율은 48.3%를 나타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브라질(1-4 패)과 9위 포르투갈(2-1 승), 14위 우루과이(0-0) 등 강호들을 연달아 상대하면서도 직전 대회(37.3%)보다 점유율이 11%포인트 늘었다.
빌드업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인 ‘골키퍼의 경기당 패스 횟수’도 17.7회에서 24.8회로 뛰었다. 발기술이 좋은 골키퍼로 평가받는 김승규(32·알샤밥)가 ‘벤투호’의 붙박이 문지기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 선수들이 파이널서드(상대 진영 3분의 1 지점)로 진입하는 횟수(경기당)도 106회에서 168회로 늘며 공격 루트의 다양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런 성과를 이뤄내기까지 벤투 감독은 여러 차례 고비를 맞았다. ‘벤투호’ 출범 이듬해에 열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4강 진출에 실패하자 국내에선 벤투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지난해 3월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0-3으로 패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직력 강화를 위해 선수 기용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고집쟁이”란 비판이 일기도 했다. ‘벤투호의 황태자’라고 불리며 그런 비판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황인범(26·올림피아코스)은 이번 대회에서 팀 내에서 가장 많이 뛰고(전 경기 총합 45km), 패스 또한 최다인 243회 뿌려주며 이런 비판을 완전히 씻어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태극전사들은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월드컵에서도 경기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진영이 아닌 중원에서 상대와 당당하게 맞부딪쳐도 두려울 게 없다는 것, 우리도 강팀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팬들은 더 큰 것을 배웠다. 한 감독에게 4년이란 시간을 주고 기다리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벤투 감독이 한국 축구에 남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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