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파산보호를 신청한 세계 3위 가상화폐거래소 FTX의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사진)가 카리브해 바하마에서 체포된 다음 날인 13일(현지 시간) 사기, 돈세탁, 불법 선거자금 공여 등 8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 금융·사법 당국은 그가 고객과 투자자들을 속여 투자를 받은 뒤 해외 호화 부동산을 사들이고 정치 후원금을 뿌렸다고 소장(訴狀)에 적시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금융사기 중 하나”라고 밝혔다. 게리 겐슬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처음부터 속임수였다. ‘카드로 만든 집’을 지어 놓고 투자자들에게 ‘가상화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건물’이라고 사기를 쳤다”고 비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뉴욕 남부지검은 이날 뱅크먼프리드를 기소하면서 공소장을 공개했다. SEC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도 뱅크먼프리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 “고객 돈을 돼지저금통처럼 사용”
SEC 소장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는 2019년 5월부터 투자자들에게서 18억 달러(약 2조3337억 원)를 조달한 뒤 이 돈으로 바하마에서 2억5630만 달러(약 3323억 원)어치의 부동산들을 사들였다. 그중에는 3000만 달러(약 389억 원)짜리 아파트도 있었다.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섬나라 바하마는 FTX의 본사 소재지다. SEC는 “투자 계열사인 알라메다도 자신의 돼지저금통처럼 이용했다”고 했다. NYT는 “이 돈으로 FTX 경영진에게 개인 대출까지 해줬다”고 전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전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홍보해 투자를 받은 뒤 몰래 프로그램을 조작해 무력화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알라메다는 고객 돈을 마음대로 투자해 대규모 손실을 봤다. SEC는 “(뱅크먼프리드가 알라메다에) 사실상 한도 무제한의 신용카드를 쥐여 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뱅크먼프리드는 불법으로 타인 명의를 빌려 미국 정치권에 수천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진보 성향 정치인에게 대부분이 흘러 들어갔지만, 공화당에도 일부가 기부됐다.
○ “자금 사용 기록 전혀 안 남겨”
FTX 파산 절차를 진행 중인 구조조정 전문가 존 레이는 이날 미국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FTX는 어떠한 자금 사용 기록도 보존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래된 횡령 수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FTX 직원들이 증빙자료를 남기지 않고 온라인 채팅방에 비용이나 청구서를 올리는 식으로 일했다고 지적했다. 또 한때 기업가치만 320억 달러(약 41조 원)로 평가받았던 FTX가 작은 기업들이나 쓰는 회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면서 “FTX에 있는 단 한 장의 문서도 믿을 수 없다. 모든 투자금 손실을 복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뱅크먼프리드는 ‘사기가 아니라 경영 실패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검사 출신 미국 뉴욕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리베카 로이페는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범인들이 ‘나는 몰랐다’며 무지(無知)를 주장하는 것은 오래된 수법”이라고 NYT에 말했다.
미국은 조만간 바하마에 뱅크먼프리드에 대한 범죄인 인도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검찰은 기소된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될 경우 최대 115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밝혔다. 뱅크먼프리드는 바하마에서 체포된 후 보석을 청구했지만 13일 기각됐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