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가스트로노미 여행’
양조장 개조 호텔서 하룻밤 묵고, 식재료 조달 과정까지 직접 체험
고가에도 주말마다 인파 몰려… 식도락에 스토리 입혀 상품화
전통사찰서 다도-요리 즐기고 온천-음식 연계한 투어도 활기
《코로나19 방역 완화, ‘엔저’ 바람을 타고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일본에서 미식을 주제로 하는 ‘가스트로노미(미식) 여행’이 주목받고 있다. 보고, 듣고, 맛보는 체험 여행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장을 가봤다.》
엔저 날개 단 ‘日미식 여행’
“1시간 전에 드신 요리를 이걸로 만들었습니다. 드셔 보세요.” 14일 일본 나라현 다와라모토(田原本)정의 한 식당. 다와라모토는 1300년 전 일본의 옛 수도 나라(奈良) 도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인구 3만2000여 명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점심을 내온 식당 대표와 직원이 데리고 간 곳은 걸어서 10분 거리의 텃밭이었다. 붉은 무, 적겨자, 파 등 식사 때 나왔던 식재료들이 텃밭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직원이 시금치를 툭 따서 “한번 씹어 보라”며 건넸다. 평소 슈퍼마켓에서 사 먹었던 시금치와는 전혀 다른, 사탕 같은 단맛이 났다. 그는 “오늘 드신 식사의 채소 재료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채소를 기르면서 텃밭을 가꾸는 이 식당은 나라 일대에서 간장 제조, 호텔, 요식업을 동시에 하는 ‘마루토쇼유’에 속해 있다. 간장을 생산하는 업체다. 마루토쇼유는 이 간장을 활용한 식사를 접대하는 동시에 음식을 어떻게 만들고 식재료는 어떻게 조달했는지를 고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완화, 엔화 약세 등으로 최근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한창인 일본에서는 이처럼 ‘식문화 체험’을 중심으로 한 ‘가스트로노미(Gastronomy·미식) 여행’이 뜨고 있다.
여행지에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새로울 게 없지만 가스트로노미 여행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수준을 넘어선다. 어떻게 식재료를 구했고 식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발달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입으로 맛보는 식이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관광업계,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력해 ‘가스트로노미 여행’을 알리고 전파하는 정책을 강화하면서 일본을 찾는 해외 관광객이 더 많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국 곳곳에 수많은 훌륭한 식문화 전통과 자원을 보유했으면서도 이를 외국인 관광과 제대로 연계시키지 못하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70여 년 전 문 닫은 양조장의 대변신
마루토쇼유의 역사는 3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89년 간장 제조를 시작한 이곳은 나라현에서 가장 오래된 간장 양조장이었다. 한때 왕실에 납품할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식량난으로 간장 재료인 콩, 밀 등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1949년 문을 닫았다.
이곳을 재발견한 사람은 당시 문을 닫았던 양조장 대표의 손자 기무라 히로유키 현 사장(46)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오사카의 의류회사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했다.
기무라 사장은 기자에게 “2001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서랍장에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할아버지가 양조장에서 쓰셨던 앞치마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폐양조장은 농기구를 넣어 두는 창고가 됐지만 수백 년간 창고에 겹겹이 스며든 간장 향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그는 호기심이 생겨 창고 정리를 하던 중, 창고 구석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간장 제조법, 양조장의 역사 등이 적힌 고문서 1000여 점이었다. 기무라 사장은 할아버지가 70여 년 전 문을 닫은 양조장을 살려내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처음 찾은 곳은 고문서 독해 수업. 양조장 창고에서 찾은 고문서에는 옛날식 일본어가 가득했다. 당시 30대 청년이던 기무라 사장이 읽을 수 없는 수준이어서 이를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고문서를 읽어 가며 양조장의 역사와 전통 양조 방식을 터득하고 간장 공부를 이어간 끝에 2014년 시험 제조를 시작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만족할 만한 간장이 됐다고 판단했다. 올 3월부터 본격 판매에 나섰다. 대도시 오사카의 샐러리맨이 마루토쇼유의 18대 ‘당주(当主·소공장 주인 등을 가리키는 일본어)’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간장에 진심이었던 그는 간장을 직접 체험하고 간장을 활용한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것까지 생각했다. 옛 양조장 창고를 호텔로 개조해 숙소로 만들었다. 간장 제조 및 식재료 재배를 직접 눈으로 보고, 이것으로 만든 음식을 맛보며 말 그대로 ‘간장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2017년 나라현 주최 비즈니스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와 지자체 보조금까지 받으면서 사업 확장에 탄력이 붙어 올해 본격 판매로 이어졌다.
옛 양조장 창고는 현재 7개 객실을 갖춘 호텔과 식당으로 재탄생했다. 객실 시설은 최신식이고 일본에서는 흔치 않은 바닥 난방까지 깔았지만 진흙을 발라 만든 옛 창고 벽의 100년 전 신문지 도배는 그대로 살렸다. 간장 제조용 물을 긷던 우물도 되살려 고객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예약을 해야만 맛볼 수 있는 이곳의 메뉴판에는 음식 이름은 물론이고 어떤 간장을 썼는지까지 적혀 있다. 숙박비는 1박에 3만5000엔(약 33만 원), 저녁은 1만1000엔(약 10만 원). 저렴하지 않지만 주말에는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다.
마루토쇼유의 음식 및 숙박 프로그램은 일본 가스트로노미 여행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수백 년 역사를 갖고 장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식재료 공장 등이 많은 일본에서는 각각의 역사를 여행객이 고객을 끄덕이며 감동할 만한 스토리로 만들어 ‘가스트로노미 여행’ 프로그램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다.
○ 지역 고용 창출·중소기업 상생에 도움
13, 14일 양일간 나라시 컨벤션센터에서는 세계관광기구(UNWTO)가 주최한 ‘제7회 가스트로노미 관광 글로벌 포럼’이 열렸다. 가스트로노미 여행의 일본 내 확산을 목적으로 개최된 행사로 아시아 국가가 UNWTO 가스트로노미 포럼을 개최한 것은 처음이다. 44개국에서 온 500여 명이 참석한 이번 포럼에서는 식문화를 주제로 한 관광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일본 각지에서 가스트로노미 여행 정책을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주라브 폴롤리카슈빌리 UNWTO 사무총장은 “가스트로노미는 식문화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경험 또한 풍부하게 만드는 소중한 체험”이라며 “지역 고용 창출, 중소기업 상생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가스트로노미 여행의 중심은 ‘식문화’다. 맛있는 것을 먹어 보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의 식재료 산지 방문, 음식 관련 축제, 요리교실 및 체험 참가 등 식문화와 연관된 모든 종류의 관광이 해당된다. 이 여행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는 와인용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 생산을 둘러보는 ‘와이너리 투어’가 대표적인 가스트로노미 여행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본에서는 ‘일식 요리 및 전통 식문화’가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을 계기로 식문화 육성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10월 한국 등 주요국 관광객의 무비자 입국을 재개하면서 외국인 유치의 주요 주제로 가스트로노미 여행을 제시했다. 와다 고이치 관광청 장관은 “음식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관광지의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가스트로노미 여행의 최적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가스트로노미 여행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음식점과 호텔만이 아니다. 먹거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떤 방식, 어떤 주제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나라 인근의 일본식 전통 사찰 지코인(慈光院)이 대표적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이 절에서는 ‘쇼진(精進)’으로 불리는 불교식 사찰 요리를 맛보고 다도 체험까지 할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사찰에서도 식사는 수행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고기류를 쓰지 않고 자극적인 조미료도 피하면서 스님이 직접 재배한 식재료를 사용해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다도 역시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 차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음미하는 과정 하나를 모두 포함한다.
코로나19 이후 2년 넘게 요리 제공을 중단했던 지코인은 최근 다도 체험만 우선적으로 재개했다. 주지 오제키 쇼쿤 스님은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움과 정신도 중요하다”며 “수행 정진을 위해 마련하는 음식인 만큼 이를 섭취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온천·식문화 연계한 여행 상품도 개발
가스트로노미 여행의 장점은 천혜의 관광자원이 없어도 주변의 평범한 것들을 활용해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3188만 명 중 3분의 2 이상인 2235만 명이 한국, 중국, 대만, 홍콩 4개국에서 왔다. 오가기 편한 이웃 나라 관광객의 상당수가 이미 일본을 다녀갔다는 의미다.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와 유명 관광지들도 일본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 관광객 대부분이 가 본 곳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일본 정부와 지자체들은 기존에 자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을 어떻게 여러 차례 다시 오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 대안으로 가스트로노미 여행이 떠오르고 있다. ‘한 번 간 곳을 무엇 하러 또 가느냐’는 인식을 깨야만 지속적인 관광업 발전이 가능하고, 이를 위해 가스트로노미 여행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유후인, 벳푸 등으로 유명한 온천 관광지 오이타현은 가스트로노미 여행에 힘을 쏟고 있는 지자체다. 이달 8일 현내 우스키시에 있는 고테가와(小手川) 주조를 찾았다. 1855년 창업한 전통 술 양조업체로 창업 당시 세운 창고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는다. 일본에서 몇 안 남았다는 나무통 증류기를 사용해 최장 30년 이상씩 숙성시킨 술 맛이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네 가쓰요시 지배인은 기자에게 “소주는 어떻게 증류하는지, 어떻게 숙성시키는지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 온도를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다”며 따뜻하게 데운 소주를 맛보라고 권했다. ‘아쓰칸(熱燗)’으로 불리는 40도 정도의 미지근한 소주에서 보리향이 가득 풍겼다.
미네 지배인은 “인근에서 재배한 보리로 담근 소주”라며 “단맛과 향기가 강한 게 특징”이라고 자랑했다. 이 양조장은 술 생산, 판매는 물론이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술 창고 견학, 시음 등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는 우스키를 ‘식문화 창조도시’로 선정했다. 이에 힘입어 오이타현은 가스트로노미 여행을 역점 관광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현 관계자는 “지역 내 전통주 업체, 간장 된장 양조장, 향토요리 전문점 등과 연계해 일본 곳곳은 물론이고 세계 주요 관광업계 및 미디어 관계자를 대상으로 체험 행사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온천과 식문화를 연계한 ‘온천 가스트로노미 여행’도 주목받고 있다. 유명 온천을 보유한 지자체와 여행 업체, 식음료 업체 등이 참가하는 ‘온천 가스트로노미 투어리즘’ 단체도 여럿이다. 온천과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 상품을 선보이고 관광객을 모집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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