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경쟁 격화]
日 반도체 속도전… “TSMC 공사 5 → 2년 단축”
TSMC 구마모토공장 신축현장 르포… 日, 투자금 11조원중 40% 파격지원
야간에도 공사… “전례없는 스피드”, ‘삼성-인텔 반도체 따라잡기’ 나서
“5년 걸릴 공사를 2년 내에 끝내려 합니다. 이런 스피드는 일본에 없었습니다.”
지난해 12월 28일 오전 일본 서남쪽 구마모토현 기쿠요(菊陽)정. 도쿄와 서울에서 비행기로 각각 2시간이면 닿는 구마모토 공항에서 차로 10여 분을 달리니 채소밭 한가운데 우뚝 선 크레인 수십 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일본에 짓고 있는 공장이다.
TSMC가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해외에 공장을 짓는 이번 프로젝트의 투자금은 총 1조2000억 엔(약 11조6400억 원). 일본 정부는 이 중 약 40%인 4760억 엔(약 4조6200억 원)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반도체가 경제 안보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세계적 반도체 기업들의 일본 내 투자 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지원을 한 것이다.
공사 현장을 안내한 기쿠요정 반도체산업지원실의 무라모토 유키 참사는 “모든 건설 스케줄은 2023년 기자재 투입, 2024년 말 제품 출하에 맞춰 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10시경 다시 찾은 현장에서는 대낮처럼 조명을 밝힌 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십 대의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철근을 나르고 줄지어 선 덤프트럭들이 흙과 자재를 쏟아냈다.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 대만에 수년 이상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 일본은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례 없는 속도전에 나서고 있다. 2021년 10월 TSMC가 “일본 정부로부터 공장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발표한 지 불과 6개월 만인 지난해 4월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는 밤낮·휴일 없이 24시간 이어져 같은 해 말 공장과 사무실 건물 4개 동이 수십 m 높이까지 올라갔다. 공장이 완공되면 2024년 10∼2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반도체가 월 5만5000장(300mm 웨이퍼 기준) 생산될 예정이다.
공사 진행을 위한 일처리는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다. 지자체는 지하수로 공업용수 확보 문제를 수개월 만에 풀었고, 도로 정비 및 신규 건설도 추진 중이다. 기쿠요정 관계자는 “지하수 고갈을 걱정하는 일부 주민의 문의가 있긴 했지만 공장 건립 반대운동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용수 및 전력 등 기반 시설 확보에만 정부와 지자체, 주민이 수년씩 갈등을 겪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반도체 규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근 내놓은 ‘차세대 반도체 전략’에서 “일본은 첨단기술에서 한국 삼성전자, 미국 인텔 등에 10년 뒤진 후진국”이라며 “반도체에 뛰어들 마지막 기회로 TSMC 유치와 거점 확대를 통한 ‘캐치업’(따라잡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구마모토 신축현장 르포 2021년 계획발표뒤 6개월만에 착공 21만m² 용지에 벌써 수십m 건물 올해 완공뒤 내년 제품출하 목표… 소니-도요타도 주요 주주로 참여
한때 세계 최고 반도체 강국이었던 일본은 2012년 자국 반도체 기업인 엘피다 메모리의 파산 이후 글로벌 경쟁 대열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최근 미중 경쟁 격화에 따른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계기로 일본은 구마모토현에 TSMC를 유치하며 ‘반도체 강국’ 탈환을 위한 시동 걸기에 나섰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반도체 인재 육성 전략에 합의한 데 이어 정치권과 정부, 지자체, 대학이 ‘원 팀’이 돼 반도체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 소니-도요타와 반도체 만드는 TSMC
TSMC 일본 공장은 일본 소니그룹과 도요타자동차 부품 자회사인 덴소가 주요 주주로 참여한 TSMC 현지 법인인 JASM이 짓고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21만6000m²)과 비슷한 21만3000m² 규모의 TSMC 공장 용지는 반도체를 생산하는 FAB동(공장)과 사무동 등 4개 건물로 구성됐다. 현재 기초공사는 거의 끝난 상황이다.
TSMC 일본 공장은 구마모토 반도체 단지인 ‘세미콘 테크노파크’에 들어서고 있다. 공사 현장 바로 옆 소니 테크노센터는 인공지능(AI), 로봇 등의 필수 부품인 이미지 센서를 생산한다. 소니 이미지 센서 세계 시장 점유율(44%)은 지금도 삼성전자(30%)를 앞서 세계 1위지만, 향후 수년 내 점유율을 60%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2025년까지 수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다. TSMC 유치가 마중물이 돼 도쿄일렉트론, 미쓰비시전기 등 관련 기업도 이미 공장을 세웠거나 투자 계획을 내놨다.
공장 인근 채소밭 사이에 들어선 원룸 건물과 기숙사, 장기투숙객용 호텔 등은 대규모 개발이 한창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택시 운전사는 기자에게 “출퇴근 시간대에는 길이 막혀 1시간도 더 걸린다. 건설 근로자와 소니 직원들로 북적북적하다”고 전했다.
지역 금융사인 후쿠오카파이낸셜그룹은 대만 최대 민간은행인 CTBC와 제휴하고 대만 반도체 기업 및 스타트업의 일본 진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현지 국립대인 구마모토대는 지난해 대학원에 반도체 교육연구센터를 설치했다.
○ 日 “뒤처지면 경쟁에서 영원히 탈락” 절박감
일본 정부는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려면 두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기시다 총리는 최근 “TSMC 공장 유치로 10년간 4조 엔(약 39조 원)의 경제 효과와 7000명의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며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추가경정예산으로 1조3000억 엔(약 12조62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반도체 지원 정책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일본국제문제연구소(JIIA)는 지난해 12월 내놓은 ‘반도체 산업 강화에 나선 한국’ 보고서에서 반도체 시설 투자에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K칩스법’에 주목하며 “여야 간 격렬한 대립으로 법안은 통과되지 않고 있다”(지난해 12월 23일 국회 통과)고 짚었다.
특히 일본은 이번에 뒤처지면 반도체 경쟁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것이라는 절박감이 강하다. 정부의 반도체 전략 수립에 중점적 역할을 해 온 아마리 아키라 일본 중의원은 같은 달 도쿄 반도체 전시회에서 “제조 거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소재 기술, 제조 장비가 (해외로) 빨려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반도체 전략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TSMC가 도쿄 인근 쓰쿠바에 지난해 6월 세운 연구개발(R&D)센터는 12월 첫 시험 제작을 했다. TSMC가 해외에서 클린룸을 갖춘 R&D센터를 운영하는 건 이곳이 처음이다. 지난해 11월에는 키옥시아, NTT, 소니, 도요타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차세대 반도체 개발 생산 회사 ‘라피더스’를 세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