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주에 위치한 과다르항은 전략요충지로 통한다. 아라비아해에 면한 과다르항은 호르무즈해협에서 동쪽으로 400㎞, 파키스탄 제2도시 카라치에서 서쪽으로 434㎞ 떨어져 있다. 과다르항은 석유가 풍부한 중동과 석유를 대량 소비하는 중국 등 아시아를 연결하는 물류 요충지이자,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사기지 역할도 가능한 곳이다. 또 중국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카스까지 연결하는 길이 3000㎞의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PEC) 출발지이기도 하다.
CPEC는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460억 달러(약 56조7732억 원)를 투입해 2030년까지 중국과 파키스탄을 잇는 철도, 도로, 송유관, 교량 등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중국이 중동산 원유를 과다르항에서 환적해 CPEC를 통해 운송할 경우 현재 말라카해협을 지나는 1만2000㎞ 거리를 2395㎞로 단축할 수 있다. 중국은 2015년 CPEC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대가로 과다르항 운영권을 40년간 확보하고, 파키스탄에 상당한 규모의 차관까지 제공했다.
중국에 빌린 빚 크게 불어난 파키스탄
그런데 지난해 10월부터 과다르항을 비롯한 CPEC 건설 현장 등에서 파키스탄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돼 공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 이유는 파키스탄 정부가 2020년 과다르항 지역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총 20㎞ 길이의 철책과 검문소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로 인해 생활이 크게 불편해졌을 뿐 아니라 중국 어선들의 불법어로로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검문소와 철책 축소, 불법어로 중단 등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CPEC 건설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그러자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파키스탄 정부는 과다르항 인근 지역에서 5인 이상 모이는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내렸다. 그럼에도 발루치스탄주에 사는 소수민족 발루치족 일부는 발루치스탄해방군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중국 기업이 지금까지 건설한 호텔에 대한 무장 공격, 주파키스탄 중국 대사를 노린 폭탄 테러, 카라치대 공자학원 버스 자살 폭탄 테러 등 CPEC 건설을 방해하는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지난해 6월부터 3개월간 이어진 사상 최악의 대홍수 사태로 300억 달러(약 37조 원) 피해를 입은 데다, 일대일로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실상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 파키스탄의 외환보유고는 58억 달러(약 7조1600억 원)에 불과하다. 반면 대외부채는 1300억 달러(약 160조4400억 원)에 이르고, 그중 중국에 진 빚은 230억 달러(약 28조40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지난해 11월 2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중국 정부로부터 차관 40억 달러(약 4조9400억 원), 중국 상업은행으로부터 33억 달러(약 4조700억 원)를 받아냈다.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때문에 ‘부채의 덫’에 빠지고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또다시 대규모 자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또 중국 정부는 파키스탄 정부와의 통화스와프를 기존 300억 위안(약 5조4600억 원)에서 400억 위안(약 7조2800억 원)으로 확대했다.
부채 상환 못 해 자산 중국에 넘기는 국가들
중국 정부는 올해 일대일로 프로젝트 10주년을 맞아 대규모 기념행사를 갖고 성과를 과시할 예정이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150여 개국과 32개 국제기구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국들로부터 석유 등 각종 에너지와 광물을 독점적으로 수입하는 경제협력을 통해 중화경제권을 구축하고,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키워왔다.
하지만 파키스탄처럼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개발도상국(개도국)과 저개발국은 줄지어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스리랑카, 잠비아, 에콰도르, 레바논, 가나, 이집트, 튀니지, 페루, 에티오피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우간다 등이 디폴트를 선언하거나 경제위기에 빠졌다. 중국이 이들 국가에 일대일로 참여를 독려한 결과, 이들 국가는 경제악화 등으로 빚더미에 앉게 됐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22년까지 최빈국 74개국이 갚아야 할 채무 규모는 350억 달러(약 43조1900억 원)에 이르고, 이 중 40% 이상이 중국에 상환해야 하는 부채였다. 또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항만·공항 등 운영권을 중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스리랑카는 14억 달러(약 1조7300억 원)가 투입된 함반토타항 운영권을 중국 업체에 넘겼다. 이집트, 우간다, 캄보디아도 주요 자산에 대한 운영·소유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서방 국가들은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부채의 함정(debt-trap)’이라고 비판해왔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3년 일대일로 프로젝트 추진을 선언한 이후 지금까지 중국 정부의 누적 투자액은 9320억 달러(약 1150조1812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중국 정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집중적으로 차관 등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국가들이 항구, 도로, 철도 등 국가 기반시설을 건설하면서 중국에 대한 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 ‘아프리카의 부채 고통에 대한 대응과 중국의 역할’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전체 대외 부채 규모는 2020년 기준 6960억 달러(약 858조6552억 원)다. 이 가운데 중국에 대한 부채는 12%인 835억 달러이며 앙골라(426억 달러), 에티오피아(137억 달러), 잠비아(98억 달러), 케냐(92억 달러), 나이지리아(67억 달러), 카메룬(62억 달러), 수단(61억 달러), 콩고공화국(54억 달러) 순으로 많다.
중국은 개도국 및 저개발국과 차관 계약을 맺을 때 철저히 ‘차이나 스탠더드(China Standard)’를 적용한다. 차이나 스탠더드는 공사에 중국산 기자재를 쓰고, 중국 업체가 중국인을 고용하는 등 공사를 맡으며, 중국 기업이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개도국과 저개발국은 투명성 확보와 부패 방지 방안 마련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선진국이나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차관을 제공받기 어렵다 보니 중국이 제시한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국가 차원 고리대금업
일대일로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그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 차관의 평균 금리는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오르기 전인 2021년에도 연 5%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금리는 연 2%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스와프 금리는 평균 0%대였다. 유럽연합(EU)의 재정자금 지원 금리도 연 3%대다.
중국은 채무 상환 기간 역시 대부분 10년 미만으로, IMF 등과 서방 국가들이 개도국에 제공하는 공적개발원조(일반적으로 이자율, 상환 기간, 거치 기간 등 3요소를 고려해 시중 일반자금 융자보다 차입국에 유리한 조건에 제공하는 양허성 차관) 상환 기간이 28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훨씬 짧다. 특히 중국은 차관을 제공할 때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중국이 채무국의 주요 자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을 계약서에 넣는다. 높은 이자 탓에 불어나는 원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중국이 공항이나 항구 운영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중국만 배 불리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추악한 민낯’이라고 볼 수 있다. 세바스티안 호른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의 해외 투자액 중 구제금융 성격의 차관 비중은 코로나19 사태 전만 해도 20%가 안 됐지만 지난해 60%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구제금융성 차관은 IMF 구제금융액의 20% 수준에 달한다.
통화스와프 협정은 경제난에 빠진 국가가 자국 화폐를 맡기고 미리 정해진 환율로 상대국 통화를 빌려올 수 있는 국가 간 계약을 말한다. 중국은 최근 들어 차관을 이 통화스와프 협정 형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또 외화가 바닥난 일대일로 참여국을 대상으로 통화스와프 계약을 연장해주는 금융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1월 8일 남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일대일로 참여국 아르헨티나와 350억 위안(약 6조37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제공하는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중국은 2021년 기준 40여 개국과 4조 위안(약 728조 원)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는데, 이 중 20여 개국이 일대일로 참여국이다. 호른 이코노미스트는 “통화스와프로 위안화를 받는 국가는 위안화 결제가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서방 국가들은 일대일로 참여국은 물론, 중국과 통화스와프를 맺은 국가들이 빌려 쓰는 중국 차관은 구제금융이 아니라 ‘악마의 자금’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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