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 러 침공 1년, 현장을 가다
‘美-서방 민주주의 vs 러-中 권위주의’ 대결로 확산
바이든, 1년 맞아 폴란드 방문… 푸틴은 ‘맞불 연설’
민간인 7000명 숨져… 우크라 “끝까지 싸울 수밖에”
“전쟁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힘드네요.”
1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의 한 재활센터. 물리치료를 받던 군인 올레크 씨는 “러시아군이 침공 초기 두 달 정도는 국제 전쟁협약을 지키는 듯했지만 이젠 마을 전체를 초토화하는 전략과 함께 ‘인(燐) 폭탄’까지 쓰는 잔인함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악마의 무기’라고 불리는 ‘인 폭탄’은 피부에 닿으면 살을 태운다. 제네바협약 또한 민간인 지역에서 사용을 금하고 있다. 그는 최전선 격전지인 동부 돈바스 내 루한스크에 배치됐다가 지뢰 파편이 대퇴 경부에 박히는 부상을 입었지만 “우린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을 맞으며 출구 없는 ‘출혈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전장으로 전 세계가 미국 등 서방 민주주의 진영 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권위주의 진영으로 양분돼 일종의 ‘대리 세계전쟁(a proxy world war)’을 벌이는 양상이다.
양 진영 간 기싸움은 팽팽하다. 미 정치매체 더힐은 “이번 전쟁은 초기부터 두 나라의 국지전 이상이었다”면서 “많은 측면에서 (6·25전쟁 당시) 남북한을 둘러싼 (강대국의) 대리전과도 닮아 있다”고 분석했다. 미 백악관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전쟁 1년을 앞둔 20∼22일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를 방문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또한 21일 모스크바에서 국정연설을 한다고 타스통신 등이 전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흔은 깊어지고 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지난달 15일까지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최소 7000명 숨졌다. 하루 평균 22명꼴로 사망하고, 35명꼴로 다친 격이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 또한 양국 군인이 최소 2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했다.
이날 오전 9시가 안 된 시간에도 키이우 재활센터는 만원(滿員)이었다.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채 휠체어를 타거나 수술을 받아 목발에 몸을 의지한 군인이 가득했다. 의사 안드리 팔라마르추크 씨는 “병원으로 실려 간 군인들이 자리가 없어 재활센터로 실려 오는데 의료진도 의료기기도 매우 부족하다”고 했다.
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키이우 북서쪽 소도시 부차의 피란민 임시 거주지에는 대부분 50∼60대 이상 노령층만 남았다. 아이들이 전쟁의 공포를 이기며 피신해 있던 놀이방에도 먼지 쌓인 장난감만 있었다. 러시아군의 폭탄에 남편을 잃은 류보프 악세노바 씨는 “단전과 혹한으로 어린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다.
우크라 국민들 “백년전쟁 안두려워… 결국 우리가 이긴다”
우크라 현장을 가다
폐허된 도시 전체가 ‘전쟁박물관’… 의족 낀 군인 “끝까지 싸울 것” 대공습 불안 속에도 항전 의지… 일부선 “어떻게든 전쟁 멈춰야”
“우크라이나여, 침착하게 싸우자!”
11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북서쪽 소도시 부차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 초소에 걸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동요하지 말고 반드시 러시아군에 승리하자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결의가 담긴 듯했다.
부차는 지난해 2월 24일 침공 직후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러시아의 민간인 집단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비극의 현장이라는 점을 보여주듯 부차 일대의 상황은 키이우 도심보다 훨씬 나빴다. 곳곳에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무너지고 불에 탄 민간인 주택, 주유소, 대형 쇼핑센터 등이 녹슨 채 흉물로 남아 있었다. 흡사 거대한 ‘전쟁 박물관’ 같았다.
하지만 키이우와 부차 현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은 대부분 강한 항전 의지를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한국 등 세계 각국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생면부지의 기자에게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다만 일부는 길어지는 전쟁에 지친 표정 또한 역력했다.
●두 다리 잃은 군인 “푸틴 죽을 때까지 싸울 것”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전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러시아에 대한 항전 의지를 내비쳤다. 키이우의 재활센터에서 만난 군인 아르템 씨는 최전선인 남동부 헤르손에서 지뢰 파편에 두 다리를 잃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숨질 때까지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며 “푸틴은 우리를 살인하도록 러시아라는 국가를 조작한 짐승”이라고 거세게 비난했다.
아르템 씨는 재활훈련 도중 의족을 잘못 사용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회복해 러시아와 다시 싸우겠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민간인 가옥의 가전제품을 훔쳐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만 우크라이나인은 가족과 조국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재활센터 의사 안드리 팔라마르추크 씨는 “전장에서 심한 부상을 당해 이곳에 온 군인들도 거의 대부분 치료한 뒤 다시 싸우러 돌아가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부차의 피란민 임시 거주지에서 만난 유리 나자렌코 씨도 “이 전쟁이 ‘백년전쟁’이 된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 결국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나마 파손이 덜한 키이우 도심에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삼성전자가 입주했던 대형 빌딩도 포격으로 유리창과 외벽이 뜯겨 나갔다. 조심스레 일상을 되찾으려는 모습도 보였다. 해외 유명 브랜드를 제외한 현지 상점들은 속속 문을 열고 있었다. 한 여성 시민은 “전쟁 후 영업을 중단했다가 문을 여는 가게가 늘고 있다. 일부 나이트클럽에는 주말에도 사람이 붐빈다”고 말했다.
●“무너진 집 언제 재건될지 기약 없어”
다만 침공 1년을 맞는 러시아가 올봄 대반격을 예고하면서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영어 교사인 올렉산드라 베이라시 씨는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피란 간 친구들이 숨죽여 러시아의 대공습 여부를 지켜보고 있다. 키이우가 큰일 없이 봄을 넘기면 집으로 돌아오겠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추가 인명 피해에 대한 걱정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목소리도 상당했다. 키이우 재활센터에서 만난 군인 올레크 씨는 올 1월 1일 가장 가까운 유년 시절 친구를 잃었다고 했다. 지뢰 파편에 부상을 당해 큰 수술을 거친 그는 “내가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가족과 친구가 죽을까 봐 두렵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의사 팔라마르추크 씨는 “일이 끝나면 슬픈 마음에 매우 힘들다”고 토로했다. 심하게 다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애써 침착하려 하지만 평정심을 지키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도미츠크에서 부차로 피란 온 류보우 악세노바 씨도 “이 건물에서 매일 누군가를 잃었다는 말들이 나온다”며 “국가가 어떻게든 전쟁을 멈추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야 한다”고 호소했다.
일부 시민은 정부가 국민들의 기대만큼 재건 사업에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나자렌코 씨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집이 불에 타버려 피란민 거주지로 왔다. 그는 “정부가 아파트의 창문만 달아줬고, 내부는 모든 게 파괴된 상태 그대로”라며 “언제 집이 수리될지 알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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