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전에 선전전까지… 한국서도 싸우는 우크라 전사들[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0일 14시 10분


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지난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 소식,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 1년째 되는 날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이 자국 영토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혈전을 벌일 때 이곳 한국에서도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 싸운 ‘전장 밖 전사들’이 있습니다.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입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부터 약 한 달간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 9명을 인터뷰했습니다. 러시아 규탄 시위와 전시회, 고국 지원 모금을 위한 콘서트 및 각종 활동을 통해 평화를 외쳐온 이들은 “조국을 위해선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결연하게 말했습니다. 이들이 1년간 펼친 ‘평화 투쟁기’를 소개합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시위, 모금, 공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를 외치고 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지난해 2월 2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살던 안나 보크란 씨의 29번째 생일이었다. 보크란 씨는 이날 하루 종일 바빴다. 다음날 인생의 새로운 장(chapter)이 펼쳐질 것이었다. 한국 정부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된 그는 24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23일 저녁 그는 부모님과 함께 키이우 시내 레스토랑에서 축하 식사를 했다. 어머니와는 사진을 찍었지만 아버지와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안나, 전쟁이 터졌어. 러시아가 공격하고 있어!”

24일 오전 6시. 기상까지 두 시간이나 남은 때 걸려 온 전화에 보크란 씨는 눈을 떴다. 동북부 하르키우에 사는 친구였다. ‘이 새벽에 전쟁이라니. 아무리 출국 날이어도 농담이 지나치네’라는 생각도 잠시, 이날 탑승 예정인 폴란드 항공사로부터 “모든 비행편이 취소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내 생각은 또렷해졌다. ‘진짜 전쟁이 터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해 2월 말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 인근에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몰려 있다. 안나 보크란 씨 제공.


3월 2일, 우여곡절 끝에 그를 태운 한국행 비행기가 폴란드에서 출발했다. 이제 유학생이자 동시에 피란민이다. 눈을 감으니 그가 타고 있던 차 바로 위를 날아 간 러시아군 미사일, 포격을 받아 산산조각난 건물 등이 자동 재생됐다. ‘살았다’는 안도감 위로 더 무겁게 쏟아지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전장 밖 전사’”
우크라이나에 보낼 거즈를 들고 있는 류드밀라 페트렌코 씨. 류드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어느덧 한국 거주 10년차를 넘긴, 두 아들 엄마 류드밀라 페트렌코 씨(42)는 이달 8일 23kg짜리 수화물 가방을 들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거즈 감기약 연고 같은 비상 의약품이 가득한 가방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우크라이나에 도착할 예정이다. 서울에서 반전(反戰)시위를 하다 만난 우크라이나인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가 오스트리아 공항에 도착하면 가방을 받기 위해 또 다른 우크라이나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다. 이 친구는 현지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사람을 찾아 가방을 쥐어 줄 것이다. 페트렌코 씨의 ‘우크라이나 배송 작전’은 말 그대로 손에 손을 거쳐 이뤄졌다.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에 의약품이 부족하다”며 온라인에 올라온 글을 보고 시작한 의약품 배송이 어느새 10회를 넘겼다.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물어 물어 유럽에 가는 사람을 찾고, 현지에서 가방을 받아줄 우크라이나 난민 ‘배달원’을 구했다. 배달 작전 경유지는 이제 폴란드 독일 루마니아를 비롯해 유럽 8개국으로까지 늘어났다. 그는 “매순간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에서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왼쪽)와 율리아 곤차렌코 씨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져온 도자기 등을 판매하고 있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에서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왼쪽)와 율리아 곤차렌코 씨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져온 도자기 등을 판매하고 있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이제껏 의약품 구입과 배송에 들어간 1000만 원 넘는 비용은 대부분 자신이 냈다. 이를 위해 과거 우크라이나에서 가져온 도자기와 액세서리까지 벼룩시장에서 직접 판매했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가 보낸 의약품을 받고 감사를 표시하는 병사들 사진을 꺼내본다. 그는 “눈물이 날 만큼 힘든 순간의 연속이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나라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가 보낸 의약품을 받은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가 보낸 의약품을 받은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사진을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류트밀라 페트렌코 씨 제공.
“그 친구는 평생 28세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 거에요”

2017년 한국에 와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근무한 율리아 곤차렌코 씨(30)는 담담하게 지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학교 같은 반이던 소년은 전쟁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3월 바로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가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곤차렌코 씨는 지난 1년간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전 시위와 각종 모금 활동에 빠지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영원히 ‘20대’에 남은 친구들을 기리기 위해서다.

지난헤 6월 인천 미추홀구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전시회에서 율리아 곤차렌코 씨가 자신의 작품을 활용한 전시회 포스터 앞에 서 있다. 율리아 곤차렌코 씨 제공.
곤차렌코 씨는 지난해 6월 인천에서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전시회를 열었다. 그해 봄 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어머니와 양아버지를 모두 잃은 16세 소녀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주변에서 평온하게 인생을 보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며 몸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어요. ‘왜 내 조국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전시회에 내높은 작품 속 ‘소녀’는 조국 우크라이나를 상징한다. 파란 배경에 파란 머리를 한 소녀는 나라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울고 있다. 동시에 소녀는 밝은 노란색 나무를 손에 들고 있다. 파랑과 노랑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색이다. 전쟁이라는 비극에서도 희망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크라이나처럼 대담하게’.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 지원 모금 활동을 위해 직접 디자인해 판매한 티셔츠에 새긴 문구다. 그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어디에 있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우크라이나인들은 모두 “싸우기 위해 울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작든 크든 각자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온 마리야 콜레스닉 씨(29)는 전쟁 발발 직후 친구 카트리나와 같이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달려가 한국어 번역과 물품 정리를 도왔다. 러시아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난 도시 부차에서 지난해 2월 탈출한 마리야 티모센코 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시위라는 것에 참가해 ‘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폴란드 난민 캠프에 있을 때 매일 울면서 부른 노래”라고 소개한 그는 “노래할 수 있으면 노래하고, 말할 수 있으면 말하는 것이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전쟁 통해 우크라이나 정체성 찾게 돼…우크라 전통 한국에 알리고 싶어”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 결선 장면.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입은 율리아 스테파넷 씨(왼쪽에서 네 번째)와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 국가를 부르고 있다. 이고르 씨 제공.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 결선 무대. 우크라이나 민요 ‘초원에 붉은 칼리나(Oy u lyzi chervona kalyna)’가 울려 퍼졌다. ‘가막살나무 꽃아, 고개 숙이지 마라. 우크라이나야, 걱정하지 마라’는 노랫말이 흐르자 한국인 관객들은 우크라이나 말을 하나하나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노래에 집중했다.

첫 출전한 우크라이나팀은 우크라이나 전통 민요와 춤으로 구성된 무대를 선보이며 3위를 차지했다. 무대에서 건반을 맡은 고려인 출신 우크라이나인 줄리아 전 씨(30)는 “전쟁은 우리 스스로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열린 세계문화축제 결선에서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입은 율리아 주크 씨(오른쪽)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고르 씨 제공.
우크라이나 전통무용 전공자 무용수 율리아 주크 씨(35)는 지난해 2월 이후 한동안 잊고 살았던 전통춤 호팍(전사의 춤)을 다시 추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전공한 전 씨는 최근 러시아 작곡가 대신 우크라이나 작곡가들 노래를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가수 율리아 스테파넷 씨는 지난해 제주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우크라이나 민요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팝송을 주로 부르던 그 역시 전쟁을 계기로 전통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가 조국을 침공한 이후 더 이상 러시아어를 쓰지 않고 오직 우크라이나어로만 이야기한다고 전했다.(우크라이나는 지역별로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 비율이 90%까지 올라간다) 주크 씨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하나’라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주장은 틀렸다”며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투쟁’은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 전쟁은 익숙해질 수 없어”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서 한 우크라이나 여성이 “우크라이나를 당장 무장시키자(Arm Ukraine Now)”고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전쟁이 터진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타국, 한국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지난 1년의 투쟁은 곧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러시아 규탄 및 반전 시위에 모인 우크라이나인들은 고국의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돼 밤을 샌 날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유 없이 침공을 받은 울분을 토해내고 함께 고개 숙여 울었다. 곤차렌코 씨는 “고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보며 비로소 내가 ‘정상’이라는 평범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현직 심리 상담가인 티모센코 씨는 우크라이나인이 집단 트라우마(common trauma)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유 없는 침공으로 한평생 살던 고향을 뒤로 한 채 낯설고 열악한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들은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이미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지인의 부상 소식을 들을 때, 집 근처에 공격이 시작됐다는 공습경보를 확인할 때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침착하다.

“이제는 고국 공습 소식을 들어도 더 이상 울지 않습니다” 보크란 씨가 인터뷰 말미에 말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눈물이 나오지 않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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