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맞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방침을 재확인했지만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결구도가 뚜렷해진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면서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여기에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 경고에 러시아 지원에 거리를 두던 중국이 본격적인 개입 태세에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강대국 패권 경쟁의 구도는 더욱 복잡해졌다는 분석이다.
● 우크라이나 양보 수용 가능성 줄고, 장기전 위험 커져
바이든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동유럽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의 안보협의체인 ‘부쿠레슈티 9개국(B9)’ 정상과의 정상회의에서 “우린 예전보다 더 강력해졌다”며 “우크라이나가 자유를 수호하는 한 우크라이나를 계속해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CNN은 “2년차를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과제는 군수조달”이라며 “비축량이 줄어들고 있는 무기 및 탄약 공급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도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가 이미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부와 크림반도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장기 소모전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더 높아지는 무기 지원 요구를 계속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바이든 행정부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모든 사람들은 이 전쟁이 어느 시점에 끝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우리 모두는 전쟁이 빨리 끝나길 원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전차와 방공방 등 새로운 무기를 지원한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은 조만간 있을 봄철 대공세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격퇴한 뒤 이를 외교협상의 레버리지(지렛대)로 삼아 종전을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크림반도 등 영토 전체의 탈환을 목표로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전투기와 미사일 지원을 촉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또 다른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계자는 CNN에 “우크라이나가 (양보안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는 작아졌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강경파를 중심으로 미국 내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부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바이든 대통령과 공화당 대선후보 경쟁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을 우회적으로 겨냥해 “세계주의 전쟁광들”이라며 “올바른 지도력만 있다면 우크라이나에서의 분쟁을 24시간 내 끝낼 수 있다”고 했다. 디샌티스 주지사 역시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 당시 “백지수표 정책은 안 된다”고 비판했다. 로이터통신은 “우크라이나 지원은 2024년 대선의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 “中, 전쟁 장기화로 美 중국 군사견제 지연 노려”
시진핑(習近平) 집권 3기 체제로 재정비한 중국이 러시아와의 본격적인 관계 강화에 나선 것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셈법을 복잡하게 할 전망이다. 시 주석의 방러를 앞둔 중국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비판하며 평화협상안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는 AFP통신에 “중국은 우리와 (평화협상안에 대해) 협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도 이날 미국 뉴욕 유엔총회에서 열린 특별회의에서 “중국에 그런 것(평화협상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CNN은 “중국은 바이든 행정부의 아시아 전력 강화 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를 원할 수 있다”며 “장기간 지속되는 갈등은 미국과 유럽 사이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으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적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평화협상안을 통해 서방 균열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군사견제 지연은 물론 미국 내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는 3중 포석일 수 있다는 것.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강화하며 경계심을 높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22일 미국 정부 당국자를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이 러시아 무기 지원을 검토하고 있는 첩보를 공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이날 외신센터 브리핑에서 “중국은 스스로를 평화의 지지자로 내세우려하지만 살상무기 지원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며 “러시아 지지에서 손을 떼면 중국의 말이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미국 제재를 위반하는 중국 기업이나 개인을 겨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며 “우리는 중국의 (제재) 위반가능성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감시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중-러 밀착 강화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은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2일(현지 시간) 러시아를 방문한 중국 외교의 실질적 사령탑인 왕이(王毅)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에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러시아 방문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크렘린궁을 예방한 왕 위원에게 “러시아는 중국과 러시아 양국이 시 주석과의 회담 계획을 실행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이는 양국 관계 발전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양국 협력은 국제 정세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왕 위원은 “현재 국제 정세는 복잡하고 엄중하지만 중러 관계는 태산처럼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또 “중러는 지금까지 제3자를 겨냥하지 않았으며, 제3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제3자의 협박은 더더욱 수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왕 위원이 말한 ‘제3자’는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왕 위원은 “러시아 측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며 “중국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갖고 위기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왕 위원을 두 팔을 벌려 맞이하는 등 격하게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국 BBC는 두 사람의 이례적인 자리 배치에도 주목했다. 이날 등장한 하얀 탁자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등이 푸틴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등장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유럽 정상들과 5m 길이의 타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왕 위원과 만날 때는 같은 탁자를 사용하면서도 중앙에서 가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눴다. BBC는 “푸틴 대통령이 중국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이고 상징적 행위”라고 평가했다.
이제 시선은 중국이 24일 발표하겠다고 밝힌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정치적 해결책’ 이른바 ‘시진핑 제안’에 쏠리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주권 존중, 영토의 완전성 확보, 유엔 헌장 존중 등의 원칙을 담으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의 평화 협상을 촉진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2일(현지 시간) AFP통신 등 서방 언론들은 익명의 우크라이나 고위 관리를 인용해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 계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전혀 상의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이날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서 열린 특별회의에서 취재진에게 “왕이 위원이 중국의 ‘평화 계획’ 핵심을 공유했다”면서도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는 전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다”면서 중국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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