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려 정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아 닷새간 수도 키이우를 찾았습니다. 이곳에 발을 닿은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매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장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큰 울림을 줬습니다. 키이우는 제게 이 모든 걸 꼭 널리 알려달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취재 후기로 소개합니다.
2023년 2월 10일 밤 9시 15분(현지 시간).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에서 출발한 열차가 9시간 넘게 달린 끝에 무겁게 멈춰 섰다. 꼭 열차가 내 가슴 위로 멈춰서는 듯한 갑갑한 이 기분. 종점에 왔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현대로템이 만들어 한국 고속철도(KTX)와 닮은 열차에 친숙함을 느끼며 달렸는데 열차를 벗어나니 정말 낯선 세계가 나타났다. 탄약 연기가 가득 메운 듯 매캐한 냄새. 전쟁의 냄새. 군복 입은 남성들이 많았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
정전이 된 듯 불을 찾아보기 힘든 키이우역 플랫폼. 열차에서 내려 어둠 속을 디뎠다. 열차 행선지가 뜬 안내판에 들어온 조명으로 나갈 길을 겨우 가늠했다. 엘리베이터를 찾을 수 없어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일일이 계단을 오르고 내렸다. 지나던 남성들이 줄줄이 달라붙었다. 가방을 들어주겠단 얘기였다. 전혀 호의로 느껴지진 않아 단호한 ‘노(No)’로 응대했다.
뽀얀 피부에 열 살 정도 될 법한 남자아이가 “하이(Hi)”라고 말을 걸었다. 영어를 연습해보고 싶단 의지로 똘똘 뭉쳤는데 마침 외국인이 나타나 반갑다는 듯.
“기자인가요(Are you a journalist)?”
옆에 있던 소년의 누나가 물었다. 내가 어찌 알았냐고 물으니 “사진을 많이 찍고 있어서”라고 답했다. 하긴 이곳에선 나 같은 기자가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이가 없다. 이곳은 전쟁 국가의 수도가 아닌가.
다들 차가운 표정으로 열차마냥 무겁게 몸을 이끌고 나갔다. 나도 겨우 플랫폼을 빠져나가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역사는 비교적 조명이 들어와 있었지만 흐릿했다. 딱 봐도 전력 사정이 안 좋음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에너지 시설을 집중 포격해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역사를 나오니 네온사인이 곳곳에 보여 오히려 놀랐다. 우리 팀을 안내하는 현지인 가이드 말로는 키이우는 전력 사정이 그나마 낫다고 했다. 호텔로 향하는 길은 어둑했다. 영화 배트맨의 고담시티를 만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종종 불 켜진 건물들도 눈에 띄었다.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밤 11시부터 통금이라 다들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 듯했다.
“에에엥!” 호텔에 들어서 체크인할 무렵 날카로운 공습경보가 울렸다. 호텔 직원은 비상시 방공호의 위치를 알려주고, 호텔 주변 지하철역을 일러줬다. 지하철역은 이곳에서 시민들이 길 가다 공습경보 때 대피하는 방공호다.
가이드가 “오늘 키이우 인근 지역까지 미사일 공격으로 도심 상점들이 문을 닫고 한바탕 시끄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놀란 우리에게 위안 아닌 위안을 해줬다.
“러시아가 공습을 한 번 하면 다음을 준비하는 데 열흘 정도 걸린대요. 오늘 큰 공습이 있었으니 그래도 열흘은 조용할 겁니다.”
키이우를 자주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위험하진 않다고 위로했지만 아무도 모른다. 미사일이, 아니면 그 파편이라도 언제 어디로 날아올지. 주우크라이나 한국 대사관에선 “극초음속 미사일이 발사될 땐 공습경보가 울리기 전에 미사일이 날아와 경보조차 소용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얼마 전 국내 언론사 직원이 숙박했던 도심의 4성급 호텔이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그 직원은 체크아웃을 한 뒤였지만 일본의 한 기자가 남아 있다가 부상을 당했다.
호텔 방에 들어오니 집에 있는 어린 두 아이 생각이 많이 났다. 첫째는 엄마가 폴란드에 있는 줄 안다. 아이는 낌새가 이상했는지 떠나기 며칠 전부터 ‘엄마 어디가’라고 자꾸 물었다. 불안해할 것 같아서 “폴란드 출장을 간다”고 말해뒀다. “폴란드 과자 많이 사 와”라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떠나오며 마음이 참 심란했다.
그런 마음을 끌고 드디어 여기까지 왔는데 경보가 첫날 밤부터 반겨주니 온몸이 긴장됐다. 호텔 방에 짐을 풀자마자 체크아웃하는 날 우크라이나를 벗어날 기차부터 예약했다. 호텔 유리창을 보니 키이우를 이미 다녀온 기자들 조언이 생각났다. ‘혹여나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창가가 위험하니 피하라’는 말이었다. 피곤하지만 깊이 잠들 수 없는 첫 밤,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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