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위스 수교 60주년] ‘혁신’ 강력 뒷받침 스위스 르포
규제는 유연-지재권 보호는 강력… ‘노벨상 27명’ 기초과학 육성도 한몫
스타트업 창업 가장 활발한 국가로
14일 스위스혁신센터 바젤 캠퍼스의 친환경 목공 건축물. 건축가 알렉산더 프란츠 씨는 “외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페인트를 바르고 내부 천장은 흙으로 다지는 등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젤·취리히=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핵심 장비와 가구를 갖춘 ‘풀 패키지’ 연구 공간이라 입주 첫날부터 오직 혁신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세계 바이오·제약 분야의 심장부로 꼽히는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스위스혁신센터(SIP)바젤 캠퍼스 연구동. 14일 찾은 이곳은 마치 ‘빌트인’ 아파트처럼 주요 장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데다 프린터 등을 갖춘 공용공간도 있었다. 카리네 모야 커뮤니티 매니저는 “이곳에 입주한 기업이나 연구진이라면 누구든 임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SIP바젤이 자리잡은 바젤 지역은 인구 56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다. 그런데도 노바티스와 ‘타미플루’로 유명한 로슈 같은 스위스 대표 제약회사는 물론이고 론자, 모더나 등 글로벌 바이오기업들과 한미약품 등 국내 업체들이 앞다퉈 진출하는 ‘혁신의 산실’이다.
이런 성공은 일부 도시나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대학, 그리고 중앙·지방정부가 이루는 생태계가 고루 튼튼하다.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협소한 국토와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탄탄한 교육, 유연한 규제와 산업진흥 정책 등으로 최근에는 스타트업 창업이 가장 활발한 국가로 꼽힌다. 스위스가 12년 연속 세계혁신지수 1위를 차지한 배경이다. 한국과의 수교 60주년을 맞아 12∼18일 방문한 스위스의 곳곳에서는 특유의 혁신을 가능케 한 여러 요소가 돋보였다.
● 혁신 기반 되는 탄탄한 기초과학
취리히연방공과대를 졸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 100주년을 기념해 가상 현실로 구현한 ‘디지털 아인슈타인’. 취리히연방공과대 제공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찾은 취리히연방공대(ETH 취리히)는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졸업한 곳이자 노벨상 수상자만 22명을 배출한 ‘명문 공대’다. 스위스 전체로는 27명이다. 로렌츠 후르니 연구부학장은 이런 성과에 대해 “기초과학이야말로 혁신의 중추”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제약회사들이 스위스에서 탄생한 것도 탄탄한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의대가 이공계 인재들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말에 그는 “이곳에선 오히려 자연과학과 공학의 인기가 더 커지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ETH취리히의 지난해 신입생의 경우 물리학과 화학 전공을 선택한 학생 수가 각각 전년 대비 12%, 25% 늘었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면서 ‘전통적인 기초학문’을 선택하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 규제는 유연하게, 보호는 확실하게
혁신이 실제 싹을 틔우도록 장려하는 제도들도 눈길을 끈다. 스위스는 유럽 내에서도 규제 방식이 유연하고 느슨한 반면, 지식재산권 보호 법률은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젤의 경우 법인세 실효세율은 13.04% 정도다. 국경을 맞댄 독일(약 30%)의 절반 수준이다. 앙케 홀나겔 SIP바젤 아시아 디렉터는 “특허 등 지식재산권으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법인세를 최대 90%까지 감면해주기 때문에 혁신적인 성과를 내면 더 낮아진다”라고 말했다.
로봇공학이나 드론 등 떠오르는 정보기술(IT) 산업의 테스트베드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로잔에 위치한 기술 스타트업 유주플라이(UZUfly)는 드론으로 도시의 이미지를 입체 촬영한 뒤 초정밀 3차원(3D) 지도로 구현해 내 건축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항공 규제가 강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로메인 키르호프 최고경영자(CEO)는 “스위스는 공공 지리정보가 매우 개방돼 있다”며 이를 통해 도시개발은 물론이고 소방훈련 등 공공영역에서도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친환경 고려하는 지속가능한 혁신
스위스 혁신의 또 다른 특성은 지속가능성과 친환경성을 우선순위로 고려한다는 것이다. 로잔연방공대(EPEL)에서 시작한 우주·해양기술기업 알마텍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여객선 ‘제스트’를 개발했다. 루크 블레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수소연료전지와 고밀도 배터리를 이용해 물 위에 떠 운행하기 때문에 시속 50km의 속도를 내면서도 기존 여객선들에 비해 연료 사용을 85%까지 줄일 수 있다”라며 “장기적으로는 경제성도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기후위기가 주목받으면서 ‘테크’를 생물다양성 보존에 접목하는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취리히대(UZH)는 세계 14개국 연구진과 협력해 멸종위기 동물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트리거드 바이 모션(Triggered by Motion)’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동물을 직접 포획해 태그를 다는 기존 방식과 달리, 카메라로 엄청난 양의 사진과 영상을 녹화한 뒤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하는 방식이다. KAIST 인류세연구센터 최명애 연구조교수와 협력해 비무장지대(DMZ)에서도 진행했다. 만서 마르타 동물행동학과 교수는 “다양한 시각 자료가 있기에 단순히 전문가들의 연구만으로 그치지 않고, 대중의 관심과 기여를 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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