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려 정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아 닷새간 수도 키이우를 찾았습니다. 이곳에 발을 닿은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매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장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큰 울림을 줬습니다. 키이우는 제게 이 모든 걸 꼭 널리 알려달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취재 후기로 소개합니다.
11일(현지 시간) 토요일 오전 9시가 안 된 이른 아침. 키이우 도심에 있는 재활병원은 붐볐다. 군복 입은 건장한 군인들이 목발이나 휠체어에 기대 드나들고 있었다. 이들 속에서 두 다리를 잃은 아르템 씨가 나타나자 이곳이 전쟁터란 사실이 확 와 닿았다.
아르템 씨는 지난해 9월 남부 격전지인 헤르손에서 7명으로 구성된 팀을 이끌고 순찰하던 중 지뢰가 터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3명은 숨졌지만 그는 다행히 손에 무전기를 지니고 있던 덕에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헤르손에서 북서쪽에 있는 미콜라이프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 상황도 여의치 않아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로 이송돼 대수술을 받았다. 그는 비록 두 다리를 잃었지만 수술을 잘 해준 당시 의사에게 재차 고맙다고 했다. 재활을 위해 수도 키이우로 옮겨온 그는 여전히 다시 싸우겠단 의지가 강했다.
전장에서 러시아군들의 만행을 직접 지켜봤기 때문이다. 마을 도로에선 폭격을 맞은 차량과 쓰러진 시신들을 보곤 했다. 그는 “푸틴은 러시아란 국가가 우리를 죽이도록 만든 짐승”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 “푸틴이 죽을 때까지”라며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곳에서 만난 의사 안드리 팔라마르추크 씨도 “재활센터에 오는 군인 90%가량이 ‘전장으로 돌아가겠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두 다리를 잃고, 정신적인 충격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싸우겠다는 그들의 결의에 숙연해졌다.
아르템 씨는 거동이 힘든 상황인데도 너무나 긍정적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면서 “나는 꼭 이렇게 극복할 것”이라고 했다.
용감한 전사들을 두렵게 하는 건 무엇일까. 적군도 아니고 자신의 죽음도 아니었다. 이들은 가족과 친구의 죽음이 두렵다고 했다. 아르템 씨도 아들과 딸, 홀로 가정을 지키는 아내와의 이별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했다. 가족이 우리에겐 가장 소중한 만큼 가장 아프다.
두 다리를 다친 20대 군인 올레크 씨도 “난 죽는 게 두렵지 않다. 가족이나 친구가 죽을까 봐 두려울 뿐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는 새해 첫날 동부 최전선에서 폭탄에 사망했다. 그 부대 팀원들이 순찰을 당했다가 단 한 명만 살아 돌아왔다고 했다.
친구의 죽음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망설여졌다. 슬픔 가득한 이 젊은 군인에게 아픈 이야기를 더 물어봐야 할지. 가끔 질문이 날카롭게 마음을 벨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돼 미안해요.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쭙습니다. (…) 혹시 하늘에 있는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올레크 씨는 울음을 꾹 억누르면서 말했다.
“친구야, 슬프지만 어쩌겠니. 이게 인생인가보다.”
이 한마디에 응축된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쟁 초기 한 달 넘게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키이우 북서쪽 부차도 찾았다. 부차로 가는 길목엔 폭격에 무너진 건물과 녹슨 탱크들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불에 타올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대형 건물 단지 근처에 있는 한 피란민 임시 거주지에 닿았다.
인터뷰를 위해 들어선 아이들 놀이방엔 유니세프 등에서 지원한 장난감만 쌓여 있었다. 러시아군의 폭탄에 남편을 잃은 류보프 악세노바 씨는 “단전과 혹한으로 어린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다. 가건물로 조립된 거주지는 전력 부족으로 절반 이상이 어둑어둑했다.
악세노바 씨는 동부 격전지인 도네츠크 지역에서 온 피란민. 농사를 짓던 남편이 미사일 폭격에 목숨을 잃고 집이 불에 탔다. 망연자실한 채 두 아이와 함께 짐을 싸 작년 여름 이곳까지 오게 됐다. 10대인 딸은 직접 미사일 파편이 날아가는 장면을 본 터라 지금도 그 미사일이 날아들까 공포에 떤다고 했다.
악세노바 씨는 집도, 농사할 땅도 잃은 채 두 아이와 함께 부차로 왔지만 생계를 이을 길이 막막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건 남편의 빈 자리. 악세노바 씨는 “아이들과 남편이 유난히 더 끈끈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한다”고 했다.
악세노바 씨는 전쟁으로 조국이 동서로 분단돼 도네츠크 지역에 남아 있는 친정 가족들과 생이별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도 했다. 전화 연결이 안 될 때마다 불안하다.
이 임시 거주지 여기저기에서 매일 같이 ‘아들이 죽었다’ ‘친구가 죽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호텔로 돌아와 만난 한국어 통역사도 “좀 전에 친한 친구 남편이 동부 최전선에서 사망했단 소식을 들었다”며 울먹였다. 가족, 절친의 죽음은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 우리가 멀리서 접하는 전쟁 속보의 사망자 숫자가 늘 때마다 이들의 삶은 매번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키이우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묘지에서 아직 싱싱한 생화가 걸린 무덤을 만났다. 이곳에 묻힌 이가 전장의 군인이었는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군인 묘지가 마련되지 않아 우크라이나 곳곳의 묘지에 전사한 군인들의 무덤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망자는 이 곳에 묻힌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전쟁 탓에 이렇게 생명이 저물어 가고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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