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유럽연합(EU)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관련 기존 북아일랜드 협약을 수정한 새로운 합의안을 타결했다. 브렉시트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발목을 잡았던 영국과 북아일랜드 간 교역 문제는 이로써 양측 행정부 차원의 합의에는 이르렀지만 의회 표결의 산을 넘어야 한다. 취임 넉달만에 합의를 도출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완전한 EU 탈퇴’를 주장하는 브렉시트 강경파와 친영파인 연방주의자 설득에도 성공할지 관심이 쏠린다.
◇英-EU, ‘윈저 프레임워크’ 합의
27일(현지시간) AFP·로이터통신과 BBC 등에 따르면 이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윈저성을 방문해 수낵 영국 총리와 북아일랜드 협약과 관련한 최종 회담을 갖고 합의안에 타결했다.
‘윈저 프레임워크’라 불리는 새로운 협약의 핵심은 영국과 북아일랜드 간의 자유로운 교역 보장이다.
영국 본토에서 북아일랜드로 이동하는 상품은 녹색 줄과 빨간색 줄로 구분된다. 아일랜드(EU)로 갈 위험이 있는 물품은 빨간색, 북아일랜드에 남는 상품은 녹색 줄로 분류된다. 녹색 줄 상품은 검역과 통관이 면제된다.
아울러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의 부가가치세(VAT)와 보조금 결정할 수 있게 되며 영국 정부 승인 의약품 등은 북아일랜드에서도 판매가 가능해진다. 영국이 EU 리서치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EU 법률 적용 시 북아일랜드 의회가 제동을 걸 수 있도록 하는 ‘스토몬트 브레이크’에 합의했다. 북아일랜드 정부가 제동을 걸게 되면 영국 정부는 이 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게 된다. 다만 EU의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최종 중재권을 가진다.
◇ 북아일랜드 협약, 무엇이 문제였나
영국과 EU는 지난 2021년 브렉시트 이후 북아일랜드 교역 문제 정리를 위해 북아일랜드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아일랜드는 EU 단일시장에 남아 EU 규제를 따르게 됐다.
또 1998년 아일랜드와 영국이 맺은 굿프라이데이 협정(벨파스트 평화협정)에 따라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이동은 유지됐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협약 이후 영국에서 북아일랜드로 가는 국내 이동 물품까지 통관 및 검역 대상에 오르며, 북아일랜드의 식료품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실제 당시 일부 북아일랜드 지역 슈퍼마켓 등에서는 신선식품 진열대와 냉장고가 텅 빈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국과 통합을 요구하는 연방주의자들은 북아일랜드 협약이 영국 본섬과 북아일랜드 간 경계를 강화하는 협약이라고 주장하며 반발하며 연정을 거부했다.
이어 보리스 존슨 전 총리 등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는 완전한 EU 탈퇴를 요구하며 북아일랜드가 영국과 같은 제도를 적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은 일방적으로 유예기간을 연장하고 협약 수정을 요구하는 등 EU와 충돌했다. 존슨 전 총리는 북아일랜드 협약이 ‘지속불가능하다’며 협약 파기에 나섰고 EU는 지난해 7월 영국이 북아일랜드 협약 상당 부분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걸었다.
이런 진통 속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일랜드섬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영국을 압박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브렉시트 강경파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물러나고 수낵 총리가 취임하면서 영국과 EU 양측은 한발씩 물러서며 대화에 물꼬를 텄다. 결국 취임 넉달 만에 수낵 총리는 윈저 프레임워크를 이끌어냈다.
◇ 연방주의·보수당 환영에도 잡음 남아
윈저 프레임워크 통과에 대해 북아일랜드 연방주의자들과 보수당은 대체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북아일랜드 연방주의 정당 민주연합당(DUP)의 제프리 도날드슨 대표는 성명을 통해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분야에 걸쳐 상당한 진전이 확보된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우리 경제 일부 부문에서 EU법이 북아일랜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며 합의안을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통일을 내세운 민족주의 정당 신페인의 미셸 오닐 부총재는 기자들에게 “합의안이 체결됐다는 사실을 환영한다”며 “DUP가 다른 정당들과 함께해 북아일랜드에 정치가 작동하도록 협력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이번 합의안을 두고 “완벽하지는 않다”면서도 “작동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에도 연방주의·브렉시트 강경파와 설득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안은 의회에서 표결을 통해 통과되는데 영국 가디언은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수낵 총리가 약 20명의 보수당 표를 얻어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DUP 내 강경파에서도 합의안이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온다. 존슨 전 총리도 이번 협상에 불만을 표출하며 DUP에 신중할 것을 조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북아일랜드 연합당의 스테판 페리는 윈저 프레임워크를 대체로 환영하지만 “스토몬트 브레이크가 북아일랜드 정부에 불안을 키우는 원인이 될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한편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만난 것을 두고 정치개입 논란도 불거졌다.
일부 정치인들은 헌법상의 이유로 국왕이 정치 문제에 관여해선 안 되며, 자칫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만나는 것이 곧 새로운 협약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왕궁 대변인은 “왕은 영국을 방문하는 세계 지도자를 만나면 기뻐하며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총리실 역시 이런 논란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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