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유럽연합(EU)이 영국 본토와 북아일랜드 간 교역장벽을 낮추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후속 협약에 전격 합의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 영토이지만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같은 생활권이라 브렉시트 이후에도 EU 단일시장에 남았다. 이중적 지위 탓에 영국 본토에서 북아일랜드로 넘어가는 물품은 한 나라임에도 검역·통관을 거쳐야 했는데 이 장벽을 사실상 없앤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유럽 주요국 간 충돌을 낳고, 미국까지 나서게 했던 북아일랜드 문제에 영국과 EU 모두 한 발씩 물러선 셈이다.
● 英 본토-북아일랜드 교역장벽 완화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27일 영국 윈저성에서 회담을 갖고 북아일랜드 협약을 개정한 ‘윈저 프레임워크’에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영국 물품이 북아일랜드로 넘어갈 때 ‘북아일랜드에 남는 것’과 ‘아일랜드 등 EU 단일시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구분해 북아일랜드에서 소비되는 물품에 대해선 검역·통관 절차를 면제하기로 했다. EU는 북아일랜드에 새 EU 규정이 적용될 때 북아일랜드 의회가 이를 거부할 수 있게 했다. 이 경우 영국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교역 분쟁이 발생할 경우 유럽사법재판소가(ECJ)가 최종 중재를 맡는다.
2020년 브렉시트 발효에도 북아일랜드는 EU 단일시장에 남았다. 당시 북아일랜드에 있는 아일랜드계 시민들이 “EU에서 탈퇴하면 경제가 무너진다”며 강하게 반발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가 영국-EU 간 관세 없이 상품이 오가는 ‘뒷문’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나왔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는 1998년 유혈 분쟁을 종식시킨 ‘벨파스트 협정’에 따라 인력과 물품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은 본토에서 북아일랜드로 가는 물품에 대해 번거로운 검역·통관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이 같은 교역장벽은 북아일랜드에서는 물론 영국과 EU의 갈등 요소로 작용해 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영국과 EU의 이번 합의에 대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에 지정학적 위험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수년간의 마찰을 종식하고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커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일랜드계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벨파스트 협정으로 어렵게 획득한 평화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라고 반색했다.
● 급한 불 껐지만 브렉시트 후폭풍은 지속
이번 후속 협약 타결로 영국 내 정치·외교적 혼란은 다소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은 지난해 5월 역사상 처음으로 총선에서 승리해 제1당 지위를 획득했다. 하지만 영국과의 통합을 주창해온 민주연합당(DUP)이 교역장벽으로 인해 영국과의 단일성이 훼손됐다며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영국계와 아일랜드계의 갈등 완화를 위해 연방주의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 간 연정(聯政)을 통해 공동정부를 꾸려야만 한다.
수낵 총리는 브렉시트를 주도한 집권 여당 보수당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국 및 EU와의 관계를 개선할 ‘묘안’을 찾아냈다. 이에 취임 4개월 만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영국 경제의 침체가 계속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이 남아 있다. 영국은 전기·가스요금 급등에, ‘물류 대란’ ‘채소 대란’ 등 각종 식자재와 생필품 유통 혼란이 겹치며 어느 때보다 국민들의 불만이 높다. 지난해 11월 영국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잘못됐다’는 응답자는 56%로, ‘옳았다’는 응답(32%)을 크게 앞섰다. 영국에서는 EU 탈퇴를 후회한다는 의미의 ‘브레그렛(Bregret·Brexit와 regret의 합성어)’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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