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최장수 뮤지컬의 퇴장…“굿바이 팬텀” [김현수의 뉴욕人]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1일 14시 00분


뉴욕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야 ‘뉴요커’가 될 수 있을까요? 가끔 여기저기서 난상토론이 벌어집니다. 8년 이상은 살아야 한다, 길거리 이상한 사람과 위험한 사람을 본능을 알게 될 때다 등등. 솔직히 뉴요커가 뭐라고 그렇게 자부심을 느낄까 싶죠. 뉴욕 특파원으로서 외부인인 제 눈에 뉴요커는 ‘서바이버’입니다. 세계각지에서 성공을 꿈꾸고 모여든 이들이 ‘이 험난한 도시에서 내 자리를 찾고 버텨냈다’는 훈장같은 느낌이요. 서바이버 뉴요커들의 에너지가 담긴 도시, 뉴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것들이 있죠. 뉴욕 브로드웨이의 최장기 터줏대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팬텀)’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캣츠’,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 등이 하나둘씩 떠나갈 때도 브로드웨이를 지켜왔죠. 하지만 한달 뒤 쯤인 4월 16일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

35년 동안 브로드웨이에서만 2000만 명이 봤고 전 세계적으로는 1억4500만 명이 본 블록버스터급 뮤지컬의 퇴장. 1980년대 화려한 뮤지컬의 한 시대가 이렇게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팬텀 브로드웨이의 마지막 불꽃


‘오페라의 유령’ 1막 첫 장면, 파리 오페라 극장 경매를 기다리는 뉴욕 마제스틱 극장 관객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한 시대를 상징하는 뮤지컬이 떠난다하니 티켓 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 1층 오케스트라석 기준으로 200~400달러까지 치솟았으니 메트 오페라랑 맘먹거나 더 비싸죠. 솔직히 뮤지컬을 제값 주고 보는 사람은 주로 관광객이거나 특정 뮤지컬의 팬 뿐이더라고요. 추첨으로 40~60달러 티켓을 구할 수 있는 ‘로터리’나 당일 현장 티켓 등등 할인 창구가 많습니다. 다만 팬텀은 끝이 정해져 있으니 마냥 로터리 당첨을 기다릴 수도 없죠.

그러니 어쩌겠어요. 티켓 값이 비싸져도 저마다 추억이 있는 아이콘의 퇴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걸요. 저 같은 사람이 막판에 몰려서 원래 예정됐던 2월 폐막이 4월로 미뤄졌습니다.

그렇게 찾은 뉴욕 마제스틱 극장. 정말 사람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말 그대로 만석. 오페라의 유령만 35년째 무대에 올린 극장이다보니 요즘 새로 꾸민 극장에 비해 로비도 좁고 화장실 사수 전쟁도 치열했네요. 마지막이라고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사진 찍지 말라는 안내원들이 계속 경고하더라고요.

예전과 달라진 점은 마치 야구장처럼 극장 안에서 플라스틱 텀블러에 담긴 와인이나 맥주, 스낵을 판다는 겁니다. 얼마 전 갔던 다른 극장에서는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주문하면 좌석으로 주류를 가져다주더라고요. 영화관도 장사 안 되는 시대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눈물겨운 살아남기 노력입니다.

팬텀에는 원래 원래 어린이들은 잘 없는데 이번에는 3대가 함께 온 가족들도 눈에 띄었어요. 늘 거기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 오겠지 했던 공연을 기억하기 위한 저마다의 의식인 듯 했습니다.

● 흑인 크리스틴의 탄생


과거 공연과 완전 달라진 점은 바로 캐스팅. 2021년 팬데믹 셧다운 이후 18개월 만에 문을 열며 여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에 브로드웨이 최초로 흑인 배우 에밀 코앗초우를 캐스팅했습니다. 에밀에 몇 달 앞서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흑인 배우가 캐스팅 됐었죠. 35살 된 팬텀이 최근 공연계의 시대정신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다양성으로 눈을 돌린 겁니다. 이 또한 팬텀이 어떻게든 동시대성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던 흔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 최초의 흑인 크리스틴 다에를 맡은 에밀 코앗초우(오른쪽) 오페라의 유령 페이스북 캡처


물론 브로드웨이 팬텀에 에밀이 최초의 흑인이 아닙니다. 2014년 팬텀 역의 놈 루이스(최애 배우! 루이스의 ‘The Music of the night’을 찾아 들어보세요)가 캐스팅 됐었고, 2016년 크리스틴과 사랑에 빠지는 라울 역의 조던 도니카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본 뉴욕 메트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를 맡은 소프라노도 흑인이었답니다.)

하지만 흑인 크리스틴을 두고 약간의 논란도 없지 않았던 것 같아요. 디즈니의 흑인 인어공주 논란처럼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이미지에 반한 캐스팅이라는 느낌 때문이겠죠. 특히 시에라 보게스가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공연’ 크리스틴으로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크리스틴의 기준이 그녀에게 맞춰버려졌어요. 초연한 배우 사라 브라이트만 이후 최고의 인기를 얻었죠.

사실 저도 1막 초기에는 조금 어색하더라고요. 다양성을 추구하려면 다른 역할들에 흑인 동양인을 대거 넣든지…… 여주인공이 거의 유일한 흑인이어서 약간 따로 노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도 편견이 작용했던 걸까요? 아니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싶은 오랜 팬의 마음이었을까요? 처음 팬텀의 던젼에서 크리스틴이 홀린 듯 고음역을 부르는 목소리의 폭발력도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그런데 에밀이 2막에서 괴로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그리며 부르는 노래,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 정말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었어요. 제 앞 열에 지루한 듯 몸을 움직이던 초고생으로 보이던 소녀가 이 노래를 들으며 아빠에게 기대는 모습도 흐뭇했네요. 점점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그녀가 삐딱한 시선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을 진심이 와 닿아서 마지막 커튼콜에 정말 모두들 혼신을 다해 박수를 쳤습니다.

올해 26살인 에밀은 카메론 이민가정의 딸로 뮤지컬의 꿈을 안고 뉴욕에 왔지만 브로드웨이 주요 배역을 맡기도 전에 팬데믹으로 졸지에 공연 자체가 사라지는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인기 배우는 다음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겠지만 에밀 같은 신인 배우는 거의 미래가 사라지는 고통이었다고 하네요.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요가 강사 자격증을 따야하나 걱정했던 고통의 시간”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년 이상 꿈을 위해 버텼고 결국 35년 팬텀 브로드웨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커튼 콜. 이것 때문에도 티켓 값이 아깝지 않았네요. 뭔가 한 시대를 보내는 듯한 오랜 팬들의 팬미팅 같아서 다들 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는 그 느낌이 대단했어요. 집에 오는 길에 4월 16일 마지막 공연을 예약해 볼까, 대체 얼마인지나 보자 찾아봤더니 역시나 이미 솔드아웃이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을 상영하는 마제스틱 극장 모습.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제작비 비싼 뮤지컬은 안녕


브로드웨이 팬텀이 떠남에 따라 이제 남게 될 최장수 뮤지컬은 ‘시카고(현 제작버전 1996년~)’, ‘라이언 킹(1997년)’이 남았습니다. ‘위키드(2003년)’도 여전히 인기가 높죠. 특히 라이언 킹은 팬덤의 마지막 불꽃 속에도 지난주 브로드웨이 뮤지컬 24개 공연 중 관객수가 1만3000명을 넘어 가장 많았습니다.

사실 이런 대형 뮤지컬은 관광객 없이는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도 팬텀은 관광객 비중이 높은 뮤지컬이었죠. 뉴욕 관광객이 팬데믹 이전의 85% 수준으로 돌아왔지만 인플레이션, 고금리까지 겹쳐 브로드웨이도 타격이 적지 않았던 겁니다. 지난해 말 K팝을 주제로 한 첫 브로드웨이 뮤지컬 ‘K-Pop’도 아쉽게 정규 개막 2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제작자이기도 팬텀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팬데믹은 계기가 됐을 뿐 관광도 경제 상황도 달라진 점이 폐막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네요. 전반적으로 뮤지컬 극장 매출이 팬데믹 이전에 비해 10~15%씩 적은 가운데 팬텀은 특히 제작 비용이 가장 높은 뮤지컬로 통하니까요.

“단순히 팬데믹 때문이 아니에요. 세계가 변했습니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로부터, 또 어느 정도는 중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죠. 세계가 어디로 향할지 지켜보는 중이고, 극장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브로드웨이의 상징이던 팬텀의 퇴장은 정말 한 시대가 갔음을 실감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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