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의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슬람교의 성월(聖月) ‘라마단’이 23일(현지 시간‧종료일은 다음 달 21일) 시작됐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이라는 뜻이다. 또 이슬람력 9번째 달을 의미한다. 창시자 무함마드가 신에게서 ‘쿠란(이슬람교 경전)’의 계시를 받은 신성한 시기로 여겨진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 중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철저히 금식(물 마시기와 흡연도 금지)과 금욕을 해야 한다. 라마단 때 금식은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다.
해가 진 뒤에는 마음껏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과의 다투거나, 시기, 질투, 음란한 생각 등을 해서는 안 된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너그러움, 나아가 화해, 용서, 평화를 강조한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때는 전쟁도 중단하는 게 옳다”고 입을 모은다.
● 극우 네타냐후 총리 재집권 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 고조돼…예루살렘은 라마단 시작에 ‘초긴장’
하지만 이슬람교의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중 하나이며 동시에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란 뜻인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는 라마단을 맞아 긴장이 감돈다.
‘극우 성향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1996년 6월~1999년 7월, 2009년 3월~2021년 6월에도 총리로 재임‧역대 이스라엘 총리 중 가장 길게 재임)가 지난해 12월 말 1년 반 만에 총리직에 복귀한 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이 고조돼 왔기 때문이다. 라마단 시작 일에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툴캄 여단의 지도자로 알려진 20대 남성을 사살해 긴장은 더욱 고조된 상황.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89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망했다. 이스라엘 정부도 팔레스타인인의 공격으로 14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민 다수가 믿는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하다(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동시에 예루살렘의 동부(동예루살렘으로 주로 불림)는 주민 다수가 무슬림이며 아랍계인 팔레스타인의 자치 지역이다. 두 진영 간 충돌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불안 지대’인 것.
특히 올해 라마단은 고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대교(이스라엘의 국민 다수가 유대교)의 명절 ‘유월절(다음달 5~22일)’과 겹친다.
두 진영을 중재해 온 미국, 이집트, 요르단이 주도해 20일 이집트 홍해의 유명 휴양 도시 샤름엘셰이크에서 평화 중재 회의가 열린 것도 현재 예루살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나라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라마단과 유월절을 앞두고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가 ‘지켜지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 팔레스타인 영토 줄이는 ‘정착촌 확장’에 대한 분노 커
무엇보다 네타냐후 정부가 다시 출범한 뒤 팔레스타인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유대인 정착촌 확장’ 움직임이 강도 높게 진행돼 왔다. 이스라엘 보수 진영이 적극 지지하는 유대인 정착촌 확장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유대인들의 집단 정착을 장려 및 지원하는 정책이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이며 동시에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줄이기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물론이고 하마스 같은 무장 정치단체들도 가장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스라엘의 도발이다. 유엔 등 국제기구도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불법으로 규정짓고 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정착촌 확장을 주요 정책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말 총리 취임 선서 때도 정착촌 확장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최근까지도 이스라엘 정부와 의회는 그동안 폐쇄됐거나 중단됐던 정착촌을 다시 개발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이런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라마단 이틀 전인 21일 마이클 헤르초크 주미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그러나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됐고,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사법부 무력화 법안(의회 과반 이상이 동의하면 대법원의 확정 판결도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 포함)’을 추진하다 심각한 반대에 직면한 네타냐후 총리가 정착촌 확장이란 ‘돌파구’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라마단 전날인 22일에도 성명을 통해 “사마리아(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식 표현) 북부에 유대인 거주를 막아온 차별적이며 굴욕적 법안에 마침표를 찍었다”며 정착촌 확장 의지를 다시 한번 나타냈다.
성일광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한국이스라엘학회장)는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정착촌 확장 정책에 계속 힘을 실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라마단 기간 중 팔레스타인과 충돌이 발생하면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강경한 대응으로 관심을 돌리려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을 자극하는 ‘망언’도 계속되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의 핵심 인사로 역시 극우 성향인 베잘렐 스모트리히 이스라엘 재무부 장관은 20일 노골적으로 팔레스타인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CNN에 따르면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인 스모트리히 장관은 한 행사에서 “누가 팔레스타인의 첫 번째 왕이었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언어는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화폐라는 게 있었나? 팔레스타인 역사와 문화가 있나?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말했다.
스모트리히 장관은 지난달 서안지구 후와라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 주민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충돌하자 “팔레스타인 마을을 없애야 한다”는 발언으로 이미 국제적으로도 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스모트리히 장관은 재무부를 이끌며 정착촌 건설 업무도 담당한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 2018년과 2021년 라마단 때도 대규모 유혈사태 경험
라마단 기간 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우려하는 배경에는 ‘과거의 경험’도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2018년과 2021년 라마단 때 대규모 유혈사태가 있었다.
2018년에는 라마단 시작 이틀 전인 5월14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조치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중심지인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한국도 그렇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취지다.
당시 미국의 주이스라엘 대사관 이전은 이스라엘 건국일(5월15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은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적국의 건국일과 자신들의 최대 명절인 라마단 직전에 벌어진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건국을 이슬람권에서는 자주 이렇게 표현)’였다.
실제로 하마스의 활동 중심지인 가자지구에서는 이날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스라엘군에 의해 40명이 넘게 사망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라마단 직전에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건 노골적으로 팔레스타인, 나아가 아랍권 전체를 자극하는 조치였다”는 지적이 나왔다.
2021년 라마단 때는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하람 알 샤리프(일명 템플마운튼)를 방문하려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 당국이 막으며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 이번 라마단을 맞아 긴장이 감도는 지역은 예루살렘 외에도 여러 곳이 있다. 지난달 큰 지진으로 5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튀르키예와 시리아,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레바논, 이집트, 이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일각에선 라마단을 계기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나 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저녁 시간 때 모스크(이슬람교 회당)와 가정에서 대규모 모임이 이어지는 라마단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