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야 ‘뉴요커’가 될 수 있을까요? 가끔 여기저기서 난상토론이 벌어집니다. 8년 이상은 살아야 한다, 길거리 이상한 사람과 위험한 사람을 본능을 알게 될 때다 등등. 솔직히 뉴요커가 뭐라고 그렇게 자부심을 느낄까 싶죠. 뉴욕 특파원으로서 외부인인 제 눈에 뉴요커는 ‘서바이버’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성공을 꿈꾸고 모여든 이들이 ‘이 험난한 도시에서 내 자리를 찾고 버텨냈다’는 훈장 같은 느낌이요. 서바이버 뉴요커들의 에너지가 담긴 도시, 뉴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오! 하버드 졸업생인가 보죠?”
길에서 지인을 기다리는데 한 행인이 지나가며 말을 겁니다. 제가 서 있던 곳은 뉴욕 맨해튼 44번가에 있는 ‘하버드 클럽 뉴욕’ 앞이었거든요. 이곳은 하버드대 동문을 대상으로 연간 회비를 낸 멤버 위주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클럽’입니다. 동문은 아니라고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고 보니 길 건너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동문회관격 ‘펜 클럽’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맨해튼 5번과 6번 애비뉴 사이 44번가. 이곳은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클럽과 다른 명문 클럽들이 모여 있어 ‘클럽하우스 로우(Club House Row)’로 불린다고 합니다. 하버드 클럽 뉴욕만 해도 1865년에 결성, 1892년에 44번가 자리에 왔다고 하니 뉴욕 엘리트들의 프라이빗 클럽 원조 격인 셈입니다. 하버드 클럽의 경우 연간 회원 비용은 약 2300달러 수준이라고 하네요. 예일대, 다트머스대 등 아이비리그 학교들은 이런 회원 전용 클럽을 뉴욕에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하버드 클럽 들어가 보니
이달 중순, ‘지인 찬스’로 하버드 클럽에 들어가 봤더니 정말 신세계였어요. 이날은 ‘동문의 날’ 행사로 뉴욕의 하버드 동문들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버드 깃발이 휘날리는 건물에 들어가 보니 회원만 이용할 수 있는 고급 식당과 가볍게 마실 수 있는 바, 이벤트 홀 등이 있었습니다. 입구부터 하버드 상징색인 적갈색 카펫, 적갈색 벽지에 온 데 ‘H’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회원 전용 공간에 살짝 들어가 보니 조용한 도서관, 응접실과 같은 공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복도에 있는 책장에 있던 고풍스런 책들도 모조리 하버드 상징색인 적갈색이었네요. 하버드 클럽은 호텔도 운영하고 있어서 회원 가족이나 친지들이 뉴욕에 왔을 때 게스트룸으로 이용할 수 있더라고요. 회원 전용 스쿼시, 헬스장, 요가 클래스 등등도 가능한 클럽 하우스였습니다.
클럽 안 곳곳에 걸려 있는 동문 사진 중 버락 오바마 대통령 사진도 눈에 띄었습니다. 혹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그의 하버드 인맥도 한몫했다고 평하죠. 뉴욕에 ‘작은 케임브리지’를 만들고, 서로 교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원래 뉴욕 아이비리그 클럽하우스의 원조는 프린스턴대 동문을 대상으로 운영되던 ‘프린스턴 클럽’이라고 합니다. 1866년 43번가에 설립했고 그 이후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대학과 더불어 아이비리그는 아니지만 명문 사립 윌리엄스 컬리지 클럽이 생기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100년이 넘게 뉴욕 엘리트의 상징이던 이들 아이비리그 클럽도 팬데믹 셧다운에 직격탄을 맞았고, MZ 세대 가입률이 떨어져 고군분투 중입니다. 사실 하버드클럽도 그 조용함과 고풍스러움이 이제 막 졸업한 20대가 드나들기에는 벽이 높아 보이긴 했어요. 20년째 30년째 장기 회원인 터줏대감 선배님들과 같이 헬스장을 이용하기에는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게다가 뉴욕에 좋은 레스토랑이 넘치는데 굳이 연간 수백만 원을 내고 회원이 될 필요가 있나 하는 거죠. 굳이 클럽하우스를 거치지 않아도 동문끼리 온라인 네트워크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기도 하고요.
점점 젊은 회원들이 줄어들어 윌리엄스 컬리지 클럽이 설립 100년 만인 2010년 문을 닫았고, 전통의 프린스턴 클럽도 팬데믹 셧다운 속 회원 수 급감으로 2021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뉴욕 지역 매체에 따르면 이들 아이비리그 클럽은 젊은 졸업생 확보를 위해 막 졸업한 동문에게는 회원비를 공짜로 해준다거나, 졸업 후 4년까지는 회비를 400~500달러 수준으로 깎아주거나 하며 젊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운영비를 아끼기 위해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 클럽에 ‘세 들어’ 살기도 한다고 하네요. 컬럼비아대는 유펜의 ‘펜 클럽’ 건물에, 다트머스대는 ‘예일 클럽’ 공간을 나눠 쓰고 있다고 합니다.
●프라이빗 클럽은 폭풍 성장
아이비리그의 전통 회원 전용 클럽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았지만 뉴욕의 럭셔리 회원제 클럽은 폭풍 성장 중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세계 각지의 연예인, 기업인 등 부호들이 팬데믹 기간에 사적인 공간을 찾다 보니 놀거리도 제공해주는 회원제 클럽에 뜨고 있다는 거네요.
TV에서도 가끔 나오는 뉴욕 사교계의 엘리트클럽은 프레피룩을 한 엄격한 어퍼이스트사이드가 떠오르죠. 1836년에 설립된 가장 오래된 클럽이라는 ‘더 유니온 클럽’ 홈페이지에 가보니 게스트들은 반드시 재킷을 입어야 하고, 스쿼시를 칠 때는 흰색 옷을 입어야 한다고 써있네요.
하지만 요즘 뜨는 뉴욕의 회원제 클럽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트렌디함을 내세우며 승부를 보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인기 미드 ‘섹스앤더시티’에서 여주인공 중 하나인 사만다가 ‘소호 하우스’라는 회원 전용 클럽을 이용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다 다른 회원을 사칭했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나요? 소호 하우스는 그런 트렌디 클럽의 원조 격으로 뉴욕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아니라 글로벌 30여개가 넘는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카사 크루즈’, ‘카사 치프리아니’, ‘제로 본드’ 등이 언론에 자주 이름이 오릅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제로본드는 최근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2020년 뉴욕 노호 지역에 생긴 ‘제로 본드’는 드라마 ‘가십걸’에서 블레어의 최애 맛집으로 나오는 ‘버터’ 설립자들이 아이디어를 내 만든 회원제 클럽이라고 합니다. NYT에 따르면 45세 이상은 가입비 5000달러, 연간 회원비 4000달러를 내야 한다네요. 이런 비싼 회원제 클럽에 회원이 아닌 애덤스 시장이 자주 출몰해 구설수에 오른 겁니다. 특히 팬데믹 셧다운 이후 관광객이 줄어 고군분투하던 자영업자들이 분노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9월 런던에서 온 ‘카사 크루즈’는 회원제라기보다 ‘투자자들의 공간’이라며 20만~50만 달러를 내야 한다고 하니 어마어마하죠. 일부 공간은 일반 고급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며 회원은 약 99명이라고 합니다. 오프닝 행사에 유럽 왕족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다니 영화 속에서나 보던 광경이네요.
이런 회원제 클럽의 인기를 지켜보는 미 언론의 시각은 곱지만은 않습니다. NYT는 “부자들만 있는 클럽은 지루하지 않겠느냐. 예술가, 디자이너, 운동선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 좋다”는 한 월가 뱅커의 코멘트를 소개하며 “뉴욕에 과연 배타적 공간이 많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뉴욕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뉴욕의 최고 장점은 대중을 위한 도시라는 점이다. 누구나 하루쯤 멋진 저녁을 계획할 수 있는 곳이다”며 “최근 넘치는 회원제 클럽은 뉴욕의 암적인 존재”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클럽을 구경도 못 한 저로서는 미드 ‘석세션’이나 ‘가십걸’에서 나온 장면들이나 곱씹어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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