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도 놀림받은 뉴욕 ‘조용한 럭셔리’ [김현수의 뉴욕人]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1일 11시 00분


뉴욕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야 ‘뉴요커’가 될 수 있을까요? 가끔 여기저기서 난상토론이 벌어집니다. 8년 이상은 살아야 한다, 길거리 이상한 사람과 위험한 사람을 본능적으로 구분하게 될 때다 등등. 솔직히 뉴요커가 뭐라고 그렇게 자부심을 느낄까 싶죠. 뉴욕 특파원으로서 외부인인 제 눈에 뉴요커는 ‘서바이버’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성공을 꿈꾸고 모여든 이들이 ‘이 험난한 도시에서 내 자리를 찾고 버텨냈다’는 훈장 같은 느낌이요. 서바이버 뉴요커들의 에너지가 담긴 도시, 뉴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트렌드에 불을 붙인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패션.   AP뉴시스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트렌드에 불을 붙인 기네스 팰트로의 법정 패션. AP뉴시스

얼마 전 뉴욕 맨해튼 소호를 지나다 멋쟁이 한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질끈 묶은 머리, 레깅스와 운동화 그리고 툭 걸쳐 입은 트렌치코트. 트렌치코트를 ‘툭 걸쳐입는다’는 표현 좀 오그라들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걸을 때보니 버버리 클래식 라인인 듯 하더라고요.

요즘 뉴욕에서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운 새로운 트렌드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의 Z세대 느낌이구나 싶었습니다. ‘룰루레몬’과 ‘알로요가’가 미국을 지배하던 팬데믹 여파에서 점점 클래식 아이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잦아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일상으로 찾아들던 2021년말이나 2022년에는 ‘나는 진짜 꾸미고 싶었다’, ‘외출만 기다렸다’ 느낌이 대세였습니다. 심심했을 패션 인플루언서들은 한껏 커다란 로고로 뒤덮인 옷과 신발 액세서리로 존재감을 과시했고, 주가-코인 상승에 힘 받은 ‘영앤 리치’들은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 스타일이었죠.

하지만 이제 또 분위기가 확 달라졌네요. 로고를 알 수 없지만 소재가 좋아 보이는 재킷, 캐시미어 니트, 펜슬 스커트.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올드 머니’ 스타일이 돌아왔습니다. 브랜드를 알 수 없지만 알고 보면 헉소리 나게 비싼, 그래서 조용한 럭셔리입니다.

● ‘올드 머니’ 스타일이 돌아왔다

얼마 전에 맨해튼 센트럴파크 동쪽 80번가쯤을 걷다가 이번엔 멋쟁이 할머니를 마주하게 되었네요. 머리도 부스스하고 화장기 하나 없는 할머니는 하얀 티셔츠, 청바지, 검정 재킷에 운동화를 신고 분주히 걷고 있었습니다. 브랜드를 알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에르메스 벨트와 검정색 버킨 백뿐이었죠.

확실히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고풍스런 타운하우스와 아파트 사이로 뉴트럴 톤이나 블랙 위주 컬러를 입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며칠 전 식당에서 밥을 먹다 배우 클레어 데인스를 봤는데요! 검정색 머리띠가 참 예뻤습니다.

뉴욕  맨해튼 샌트럴파크 동쪽 어퍼이스트사이드. 고풍스런 타운하우스와 고급 아파트가 늘어서 있으며 이 곳 지역 거주자들을 ‘올드 머니’ 전통 부자로 일컫는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뉴욕 맨해튼 샌트럴파크 동쪽 어퍼이스트사이드. 고풍스런 타운하우스와 고급 아파트가 늘어서 있으며 이 곳 지역 거주자들을 ‘올드 머니’ 전통 부자로 일컫는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어퍼이스트사이드 스타일의 조용한 럭셔리는 특히 미국에서 인기 폭발인 드라마 ‘석세션’ 시즌 4 출시와 맞물려 더욱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석세션은 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왕국을 떠올리게 하는 미 재벌가 이야기인데요,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부자들의 이야기라 이 지역 ‘올드 머니’ 스타일 인테리어, 패션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둘째 아들 켄달 로이의 아파트가 시장에 나왔다며 “로이처럼 살 수 있는 기회다. 2900만 달러(384억 원)가 있다면”이란 제목의 기사들도 쏟아질 정도로 화제입니다.

드라마 석세션의 로이가 남매들. 화려함보다 미니멀리즘의 톤다운된 스타일을 추구한다. HBO 제공
드라마 석세션의 로이가 남매들. 화려함보다 미니멀리즘의 톤다운된 스타일을 추구한다. HBO 제공
로이 남매들이 입는 재킷이나 니트는 ‘브루넬로 쿠치넬리’, ‘로로 피아나’, ‘더 로우’처럼 겉으로는 브랜드는 알 수 없지만 소재나 색깔이 고급스런 럭셔리 브랜드 제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돈(money)이 떠들 때 부(wealth)는 속삭인다”는 느낌입니다.

스키장 사고로 민사 소송을 당한 배우 기네스 팰트로우의 법정 출두 스타일도 조용한 럭셔리 트렌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카키색 코트, 화이트 가디건, 회색 재킷 등 그녀가 유타주 법정에서 선보인 패션이 인터넷을 아주 뜨겁게 달구고 있네요.

맥시멀리즘에서 절제된 미니멀리즘으로 패션의 흐름이 바뀜에 따라 브루넬로 쿠치넬리나 로로 피아나보다 조금 가격대가 내려온 (그러나 우리 일반인에게는 여전히 비싼) 뉴욕 브랜드 ‘케이트’나 스웨덴 브랜드 ‘토템’도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케이트는 구조적 디자인의 캐시미어 카디건과 뉴트럴한 색감, 너무 와이드하지도 스키니하지도 않는 청바지로 유명하죠. 올해 2월에 소호에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냈습니다. 수년 동안 인기를 끌어 한국에서도 직구 열풍이 불던 브랜드인데 자체 매장은 처음이라네요. 그만큼 대중적 흐름을 탔다는 거겠죠. 토템 뉴욕 자체 매장도 지난해에야 처음 생겼습니다.

반대로 구찌의 맥시멀리즘 스타일을 이끌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지난해 11월 구찌의 모회사 커링그룹을 떠났고, 발렌시아가에 대한 인플루언서 사랑은 한풀 꺾이는 분위기라고 하네요. 세계 최대 명품 기업으로 꼽히는 LVMH는 유행이 이처럼 과했다 절제했다 오고 가는 것을 감안해 2013년 로로피아나를 인수, 초상류층 소비자를 공력해 왔습니다.

● 버버리 비웃은 초 부자들

미니멀리즘이란 말은 절제된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스타일이지만 ‘조용한 럭셔리’는 ‘부’로 계급은 나누는 느낌도 들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더라고요. 그걸 바로 드라마 석세션이 꼬집어 수많은 밈을 양산했습니다.

드라마 석세션 시즌 4의 스타가 된 버버리 토트백. 미국에서 380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지만 석세션 세상 속에선 지하철 탈때나 매는 큰 가방이라고 놀림을 받아 엄청난 논란과 주목 속에 품절 사태를 빚었다.  HBO  제공
드라마 석세션 시즌 4의 스타가 된 버버리 토트백. 미국에서 380만 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지만 석세션 세상 속에선 지하철 탈때나 매는 큰 가방이라고 놀림을 받아 엄청난 논란과 주목 속에 품절 사태를 빚었다. HBO 제공
“저런 터무니없이 커다란(ludicrously capacious) 가방이라니. 저 안에 지하철 탈 때 신는 플랫슈즈 넣으려고?”

석세션의 로건가 사위 톰이 사촌 그레그의 여자친구 가방을 욕하며 하는 말. 그 가방은 바로 버버리 체크 토트백이었습니다. 이 가방은 2900달러(383만 원)로 명품 가방을 잘 사지 않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눈에는 헉소리나게 비싼 가방인데도요! 그렇게 터무니없이 크지 않고 A4 용지 들어가는 평범한 가방입니다.

운동화를 에코백에 넣고 다니는 저도 저 대사를 듣고 쓴웃음이 나오더라고요. 뉴욕에서 우버로 10분, 15분 거리를 타도 20달러 이상 나오다보니 진짜 구두를 신고 싶은 날은 바리바리 짐을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요. 뉴욕에서 택시는 사치재입니다.

조용한 럭셔리를 즐기는 초부자들이 그들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싶어 하는 계층을 비웃는 설정. 버버리 가방 논란은 미국 소셜미디어를 들끓게 했고, 초부자들의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이 버버리 가방 검색량은 300% 늘었어요. 품절 사태가 빚어져 구할 수도 없다합니다. 미 언론들은 ‘버버리 가방이 석세션 시즌4의 진정한 스타’라고 하죠.

브루넬로 쿠치넬리나 더 로우 같은 브랜드가 석세션과 만나 조용한 ‘럭셔리’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사실 절제된 미니멀리즘은 누구나 편하게 시도할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꼭 로로피아나 캐시미어 있어야 하나요?

더 로우의  올해 봄여름 컬렉션. 신발까지 같은 뉴트럴 톤으로 맞췄다.    더 로우  제공
더 로우의 올해 봄여름 컬렉션. 신발까지 같은 뉴트럴 톤으로 맞췄다. 더 로우 제공

블룸버그 통신은 오히려 인플레이션 때문에 몇가지 기본 아이템에 투자하는 트렌드가 통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살인적인 렌트비에 시달리는 일반 뉴욕 시민들이 철마다 옷에 투자할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다고 ‘놈코어’ 때처럼 늘어진 듯 입기 싫으니 좀더 격식 있고 절제된 스타일이 인기가 높아진 것 뿐이죠. 그래서 정장 재킷이나 펜슬 스커트의 인기가 높아졌다면 오히려 그게 경기침체의 신호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통신의 분석입니다. 곧 지구의 날(22일)도 다가오는데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몇가지만 챙기는 ‘옷장 다이어트’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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