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NPG’는 어떻게 탄생했나
드골, 냉전시기인 1961년 케네디에 “파리 위해 뉴욕 희생할 수 있는가”
유럽, 美 핵우산 약속에 불신 커져
美, 핵운용 실질협의 필요성 공감… ‘1급기밀’도 공유하며 전환점 마련
한미 정상이 북핵 대응을 위해 창설하기로 한 한미 핵협의그룹(NCG·Nuclear Consultative Group)은 냉전 시대 설립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핵기획그룹(NPG·Nuclear Planning Group)을 본뜬 모델이다.
NPG는 프랑스를 제외한 나토 회원국 27개국 국방장관이 참여해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이행 방안을 논의하는 협의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26일 NCG에 대해 “(미국이 NPG를 통해) 핵무기 등 전략자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유럽과 긴밀히 정보를 공유하며 굳건히 동맹을 유지했던 것에 착안했다”고 밝혔다. 향후 한미가 NCG의 운영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도 나토 NPG가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냉전 긴장-동맹 의심 불식한 나토 NPG
나토 NPG의 시작은 냉전 시대로 거슬러간다. 소련의 군사적 급부상으로 유럽의 긴장이 극에 달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약속에 대한 나토 회원국들의 불신이 커지던 때였다.
“당신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맞바꿀(trade) 수 있는가.”
1961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던진 이 질문은 당시 유럽 대륙을 휘감았던 극도의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의 면전에서 “미국은 소련이 미 본토에 보복할 위험을 감수하고도 유럽 동맹들을 지킬 것이냐”라는 의구심을 표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력이 미 본토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자 ‘미국이 워싱턴과 뉴욕을 포기하고 우리를 지키겠느냐’는 확장억제 회의론이 한국에서 제기됐던 상황과 유사하다.
서방 국가들은 1949년 공동방위를 위해 나토를 창설했지만, 당시 소련의 군사력이 무서운 속도로 팽창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1953년 7월 유럽에 핵무기 배치를 시작했지만 관리 주체와 운용 방안이 모호해 유럽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2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나토 국방장관회의가 전환점이 됐다. 당시 로버트 맥너마라 미 국방장관은 미국의 핵 능력과 운용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판단해 ‘핵기획체계’를 제안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동맹국 간 핵무기 사용 지침에 대한 실효적인 협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그 결실로 4년 뒤인 1966년 NPG가 출범했다.
윌슨연구소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25일 아산정책연구원 주최 아산플레넘에서 “과거엔 1급 비밀이었던 정보들까지 동맹국 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바뀌었다”라고 평가했다. NPG는 현재 역내 불안에 대응하는 유효한 틀이 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나토 사무총장이 직접 NPG를 주재하고, 비공개로 실시되던 연례 핵억지 연습 ‘스테드패스트 눈(Steadfast Noon)’을 공개했다.
● ‘전술핵 없는 한미 NCG’ 실효성 우려도
한미 NCG와 나토 NPG는 핵무기 사용의 최종 권한이 모두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지만 실제 운용 과정에서 일부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튀르키예 등 나토 회원국 5개국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다. 그야말로 ‘핵 공유’다. 반면 한국에 핵무기 배치는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나토 NPG는 상설 사무국을 두고 배치된 핵무기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 회원국들과 공동 기획한다. 협의(Consultative)에 방점이 있는 NCG보다 수위가 높다.
다만 NPG가 세계 핵질서의 근간이 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채택 이전에 만들어진 틀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국방연구원 전경주 연구위원은 “미국은 최근 동맹국들의 역량을 자국의 전략기획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향후 한미 간에 국익을 둘러싼 긴밀한 조율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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