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지?’ 국제뉴스 속 궁금증을 콕 짚어 새로운 시각에 적응시켜 드립니다.
‘2년만 더 일하면 연금을 더 준다는데 그렇게까지 반대할 일인가?’
요즘 프랑스를 뜨겁게 달구는 연금 개혁 반대 시위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금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더 일하고 더 받자’는 마크롱의 개혁에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거리에서 프라이팬과 냄비를 두드리며 결사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정년 보장’은 큰 혜택이고, 하물며 ‘정년 연장’은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너무 일하길 싫어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금 개혁에 왜 그리 반대하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국에 머무는 프랑스 사람 3명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한 듯 답합니다.
“인생에서 드디어 쉴 수 있는데, 그걸 왜 미뤄야 하죠?”
▽기자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더 일하고 더 벌면 좋은 거 아닌가요? 왜 일을 안 하려고 하나요?
▽마리나 “한 마디로, 삶의 행복이 줄어들기 때문이에요. 프랑스 사람에게 휴식과 돈은 애초에 교환 대상이 아니에요. (한국에선 ‘휴일에 차라리 일하고 수당 더 받자’는 사람이 많아요.) 휴일에 왜 일을 하죠? 휴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잖아요.”
▽바네사 “누가 저한테 휴일에 일하면 더 준다고 해도 저는 절대 일 안 해요(웃음). 쉬어야 하는 날 왜 돈을 벌어야 하나요?”
▽쉐리안 “저 같은 젊은 세대들은 코로나19 직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꿨어요. 윗세대가 ‘평생 일한 후 은퇴하고 쉰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친구들은 언제든지 쉬고 싶을 때 그만 둬요. 돌아와서 다른 일을 찾으면 되니까요.”
▽기자 최대한 늦은 나이까지 일하면서 많이 벌어놔야 노후가 더 안정되지 않나요?
▽마리나 “프랑스에선 인생에서 3번의 삶이 있다고 해요. 첫 번째는 학생의 삶, 두 번째는 직장인의 삶, 그리고 마지막은 은퇴의 삶이죠. 학생 때는 꿈이 있으나 돈이 없고, 직장인은 돈이 있으나 시간이 없죠. 비로소 은퇴할 때 그동안 간직해온 꿈, 돈,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있어요. 은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안정된 삶의 시작이죠.”
▽바네사 “정년에 대한 개념이 한국과 완전 달라요. 프랑스에서 일은 결코 ‘평생’ 개념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죠. 은퇴란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의미예요. 쉴 자격을 얻는 거죠.”
▽마리나 “인생에서 ‘마침내 쉬는 구나!’ 하는 거죠. 은퇴는.”
▽바네사 “가장 중요한 건 행복이잖아요. 행복하지 않다면 일하는 게 무슨 의미죠.”
은퇴가 늦어지면 여생은 언제 즐기죠?
▽기자 하지만 ‘100세 시대’에 62세에 은퇴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바네사 “직군에 따라 다를 거 같아요. 저희 같은 교육자는 62세 넘어서 일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몸을 쓰는 직군은 다르죠. 지금도 62세 전에 연금 일부를 포기하고 조기 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삶의 질을 위해 떠나는 거죠. 정년이 64세까지 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날 거예요. 그 자리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만 부담이 늘어나는 거죠.
▽마리나 “은퇴는 두 가지가 공존해야 해요. 일단 은퇴를 해야 하고(웃음), 그 다음으로는 건강해야 해요.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해요. 은퇴가 늦어지면 특히 몸을 쓰는 직군은 아프고, 기력도 약해지고 그래서 삶을 즐기기 어려워져요.
▽기자 한국에서 은퇴는 주로 노후 자금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프랑스는 어떤가요?
▽마리나 “프랑스는 달라요. 은퇴 후 생활비는 연금으로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큰 관심은 없어요. 가족과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어디를 여행할지 같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바네사 “프랑스에서 은퇴 계획은 곧 ‘행복을 찾는 일’이에요. 저는 80, 90살이 기대돼요. 저희 할아버지는 93살에 돌아가실 때까지 인생을 충분히 즐기셨어요. 86살 때는 인터넷도 독학으로 익히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기대가 되는 거죠.”
▽마리아 & 바네사 “은퇴 연령을 정부가 일괄적으로 정하는 것도 문제예요. 남들보다 일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또 노동 강도가 높아 64세까지 일하는 것이 무리인 사람도 있어요. 마크롱 대통령은 평등의 원칙이라며 정년을 (일괄적으로) 정했지만 그건 평등과 다른 문제에요. 그런 접근은 ‘프랑스’가 아닌 거예요.”
▽기자 한국과 프랑스에서 은퇴를 보는 시각차는 왜 생긴 걸까요?
▽바네사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프랑스에선 기존 월급의 약 70%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어요. 제 할머니가 곧 97살이신데 한 달에 약 2000유로(290만원) 가까이 받고 계세요. 이전에는 연금 수령액이 지금보다 많았으니까요. 요즘 점점 줄어드는 건 사실이에요.”
▽마리나 “직업에 관한 가치관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직업과 사회적 인정이 거의 동일시 되잖아요? 일이 없어지면 곧 삶이 끝난다는 생각이 있는데, 프랑스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돈도 결국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죠. 돈을 위해 가족이나 내 시간을 포기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프랑스인들도 “더 나은 복지 원하면 북유럽 가야”
▽기자 젊은 세대는 어떤가요. 한국에선 벌써부터 노후 대책을 고민하는 2030이 많은데.
▽쉐리안 “제 친구들을 보자면, 아직 은퇴가 먼 미래라고 생각해서인지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다만 윗세대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면, 모두가 은퇴 후에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질 거란 걸 알고 있어요. 더 이상 연금이나 정부 복지만을 믿진 않아요.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은 벌써 개인용 은퇴 저축도 알아봐요. 각자 은퇴를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거죠.”
▽기자 그렇다면 지금의 연금개혁에 찬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금제도의 불안정성이 줄어들 수 있잖아요.
▽쉐리안 “아니죠. 저희가 은퇴할 때까지 연금제도가 유지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번 법안에서 더 일해야 하는 기간이 2년이 늘어났다면, 언제든지 3년, 4년, 극단적으로는 10년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정부가 나의 삶을 보장해줄 것이다’는 전제 자체가 많이 흔들리고 있어요. 코로나19 영향이 컸다고 봐요. 2년을 더 일하고 세금을 더 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큰 거죠. 그래서 정년 연장을 거부하는 거죠. 한국에선 유럽은 복지가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도 더 나은 복지를 원하면 북유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요(웃음).
▽기자 최근 통과된 프랑스 연금개혁법은 어떻게 보세요?
▽쉐리안 “우리도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아요. 다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에요. 지난해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연료를 못 구해서 사람들이 차도 못 타고 다녔어요. 5년 전 노란조끼 시위(2018년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 발표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 이후 달라진 건 없는데, 일은 더 시킨다고 하니 사람들이 분노하는 거예요.
▽마리나 “강압적 방식도 문제였어요. 헌법 49조3항 발동했잖아요. 의회 동의도 없이 법안을 통과시켰죠. (프랑스는 헌법 49조3항에 의해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의회 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바네사 “프랑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노(No)‘하는 것도 사실이에요(웃음). 그런데 논의도 없이 일을 강행한다, 그건 프랑스가 아니에요.”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은퇴하면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은지를 묻자 세 사람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일하기는 싫지만 연금은 받고 싶어서 시위하는 것 아닌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에는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복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이전부터 지켜왔던 당연한 권리인 걸요. 내가 일한 돈으로 기꺼이 세금을 많이 내고, 그에 따라 모두가 정당하게 복지를 누리는 것. 그게 프랑스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바네사)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