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텍사스 한인 가족 참변으로 본 美 총기사건
지난해 총기 사망자 4만8830명
하루 평균 133.8명꼴로 숨져
난사사고는 10년새 2.5배 증가
“미국인의 총기 소지권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겠다. 총기 사건은 정신 건강의 문제다.”(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얼마나 더 많은 미국인이 죽어야 하는가. 공화당은 총기 규제에 협조하라.”(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미국의 한인 교포 부부와 이들의 어린 자녀가 숨진 6일(현지 시간) 텍사스주 앨런 프리미엄 아웃렛 총기 난사를 비롯해 최근 미 전역에서 총기 사건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내년 11월 대선을 앞둔 집권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이 정반대의 입장을 보여 해법 마련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에 계류된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이미 올 들어 현재까지 1만4000명이 숨진 총기 사건 사고의 희생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규제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더 이상 현 상황을 방치하면 모두가 공멸할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공화당은 개인의 무기 소지권을 명문화한 ‘수정헌법 2조’를 내세워 “총기 희생자가 많아질수록 자위권 행사를 위해 총기를 보유하려는 시민의 권리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맞선다. 서부 개척의 역사, 50개 주가 사실상 독립국가나 다름없는 미국에서는 총을 자기방어의 핵심 수단이자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하다. 연방정부 권력에 대한 견제 심리가 강한 점도 이런 논리에 힘을 더한다.
이처럼 총기 문제는 낙태, 이민과 마찬가지로 미 사회에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첨예하게 입장이 엇갈리는 ‘뜨거운 감자’다. “저렇게 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데 왜 정부나 사회 전체가 손을 놓고 있느냐”는 단순한 잣대로 접근하기 어려운 의제란 뜻이다. 대형 사건이 발생하거나 주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총기 규제 찬반양론이 나오지만 실질적인 해법이 도출된 적이 거의 없는 것 또한 이렇듯 극단적으로 양분된 여론, 이에 따른 정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많은 총기 사망자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의 총기 관련 사망자 수는 4만8830명이다. 같은 해 교통사고 사망자(4만5404명)보다 많다. 하루 평균 133.8명이 총기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기준 미국에는 전 세계 총기의 약 40%인 약 3억9000만 정의 총기가 있다. 미 인구(3억3000만 명)보다 6000만 정이 많다. 이 외 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총기까지 합하면 실제 훨씬 많은 총기가 유통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2020년 기준 2280만 정의 총기가 새로 팔렸다. 이미 총기가 많은데도 연 2000만 정의 총기가 새로 팔릴 정도니 이로 인한 범죄 발생과 희생자 수 증가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10여 년간 범인을 제외하고 4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량 총기 난사(mass shooting)’가 급증했다는 점도 우려를 낳는다. 미 총기 관련 비영리단체 ‘총기 폭력 아카이브(GVA)’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7일까지 127일간 범인을 제외하고 4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량 총기 난사 사건은 208건에 이른다.
2013년만 해도 연간 대량 총기 난사는 256건에 불과했지만 2019년 415건, 2020년 610건, 2021년 690건, 2022년 646건으로 가파르게 뛰었다. 지난해 건수는 2013년보다 2.5배 많은 수치다. 현 추세대로라면 올해 대량 총기 난사는 600건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동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미국인들이 신변 보호를 위해 총기를 대거 구매하고, 3차원(3D) 프린터 기술 발달 등으로 개개인이 집에서 손쉽게 사제 총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대부분의 주에서 주류 판매 허용 연령(21세)보다 낮은 18세 이상에게 총기 판매를 허용하고 있는 점 또한 사건 사고 급증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 학교-직장 사건 이유 1위는 ‘원한 관계’
총기 관련 비영리단체 ‘더 바이올런스 프로젝트(TVP)’에 따르면 미 총기 난사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소매상점(38건)이다. 식당·술집(27건), 공장·창고(25건), 사무실(18건), 야외(18건), 거주 시설(17건), 유치원·학교(14건), 예배 시설(11건), 대학과 정부기관(이상 9건) 등이 뒤를 이었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 수는 1자루(42%)가 가장 많았고 이어 3자루 이상(33%), 2자루(25%) 등이었다. 범인 중 50%가 특정 인물 1명을 목표로 총기를 발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까지 희생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학교와 직장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에서 범인들은 ‘원한 관계’를 이유로 드는 경향이 뚜렷했다. 3월 테네시주 내슈빌의 총기 난사범 오드리 헤일(28)과 마찬가지로 학교 총기 난사범의 91%는 해당 학교의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었다. 학교 내 총기 난사범의 80%는 범행 전 자살 징후를 보였다. 또 56%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직장 총기 난사범의 70%는 해고 등 고용 문제를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 4월 켄터키주 루이빌의 한 은행에서 4명을 죽인 코너 스터전(25) 또한 해고 통보를 받자 이 같은 만행을 벌였다.
● 양분된 여론 “백약이 무효” 회의론도
총기 사건 사고 건수와 희생자가 급증하고 있지만 미 여론은 상당히 갈라져 있다. 지난달 21∼24일 폭스뉴스가 미 성인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총기 폭력을 줄이기 위해 어떤 정책을 주로 선호하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1%는 6일 앨런 아웃렛 참사에서 쓰인 ‘AR-15’ 소총 같은 “공격무기 금지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반면 45%는 “더 많은 시민이 총을 지니는 것을 선호한다”고 맞섰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의 응답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민주당 지지자의 84%는 “공격무기 금지”를 거론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불과 36%만 “공격무기 금지를 선호한다”고 밝혀 대조를 보였다. 공화당 지지자의 61%가 “더 많은 시민의 총기 보유”를 지지했지만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지지 비율이 27%에 불과했다.
‘더 엄격한 총기 규제가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들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정파에 관계없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응답자의 43%가 “나라를 더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2016년 같은 조사에서는 9%포인트 높은 52%가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특히 “(무슨 대책이 나와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란 냉소적 응답이 7년 전 20%에서 31%로 큰 폭 증가했다.
● 공화당 전당대회 방불케 한 NRA 총회
정치권의 대립 상황은 사태 악화를 부추기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이 공격무기 금지, 총기 구매자 신원 조회 의무화 등의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을 발의해도 공화당이 다수당인 하원 문턱을 넘기 어렵다. 상원 100석 또한 민주당 및 친민주당계 무소속의 합산 의석과 공화당 의석이 51 대 49로 비슷하다.
총기 옹호 로비단체 ‘전미총기협회(NRA)’는 공화당의 주요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지난달 미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NRA 연례 총회는 마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장이나 전당대회를 방불케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대사 등 공화당의 주요 대선주자가 모조리 등장해 바이든 행정부의 총기 규제 강화 행보를 비판하고 “내가 집권하면 총기 옹호나 규제 완화 정책을 펴겠다”고 외쳤다. 참석자들은 우레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을 “역대 미 대통령 중 최고의 총기 찬성자이자 수정헌법 제2조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총기 난사에 대해 “총기 문제가 아니라 정신 건강의 문제”라며 민주당이 “좌파 십자군처럼 행세한다”고 몰아붙였다.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면 “바이든의 (총기) 전쟁을 끝내겠다”고도 했다. 펜스 전 부통령 역시 “비극이 일어날 때마다 신이 주신 권리(총기 보유권)를 짓밟는 것을 중단하라”고 동조했다.
헤일리 전 대사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헌법적 권리를 빼앗으려는 세력에 맞서 여러분은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며 자신을 부각시켰다. 디샌티스 주지사 또한 영상으로 본인이 바이든 행정부의 총기 규제책 강화 방침에 맞서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연방정부의 규제 이행을 거부하는 것이 (유권자로부터) 인기가 없다는 점을 잘 알지만 거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반 의원도 아닌 대선주자들이 특정 로비단체의 행사에 참석해 입을 모아 총기 옹호 발언을 내놓은 것은 NRA의 막강한 로비 능력에 기인한다. 미 비영리 조사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NRA는 의원들의 총기권 우호도를 ‘A’부터 ‘F’ 등급까지 6단계로 나눠 로비를 벌인다. 당연히 ‘A’ 등급 의원이 많은 지원을 받는다.
반면 총기 보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F’ 등급 후보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낙선 운동도 불사한다. 공화당 당내 경선에서 총기 규제를 언급한 유명 의원이 NRA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무명 주자에게 패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2010년 이후 현재까지 NRA는 총기 옹호 의원들에게 1억4000만 달러(약 1820억 원) 이상을 썼다. 기록에 남은 돈만 이 정도이고 추적이 어려운 ‘슈퍼팩(Super PAC·특별 정치활동위원회)’ 등으로 흘러간 돈까지 합하면 얼마를 썼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 내년 대선에 미칠 영향은 ‘시계 제로’
다만 공화당의 총기 옹호 정책이 내년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쉽게 장담하기 어렵다. 공화당은 최근 수십 년간 ‘낙태 반대’와 ‘총기 규제 완화’를 충성심 높은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수단으로 썼다. 이 중 낙태 반대 전략은 지난해 6월 연방대법원이 1973년부터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해 왔던 ‘로 vs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며 정점을 찍었다.
당시 공화당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민주당 지지층과 중도층의 반발 또한 거셌다. 반(反)공화당 성향의 유권자가 대거 결집하면서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당초 상원 다수당 위치를 잃을 것으로 예상됐던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고수할 수 있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낙태 의제가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 주요 경합주에서 민주당의 승리로 이어졌다며 내년 대선에서는 총기 의제가 비슷한 양상으로 경합주 표심을 가를 것으로 내다봤다. 또 민주당이 중간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부동층은 총기 의제와 관련해 자신들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美 수정헌법 제2조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를 지닌 주(州)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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