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체류 중인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외부 충격’을 경고하며 기존 정치권의 혁신을 요구했다.
◆“국민 마음 둘 곳 잃어…알 깨지 않으면 외부 충격”
이 전 총리는 22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진행한 특파원 간담회에서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통일된 목표를 잃고 있는 것 같다. 정치는 길을 잃고 국민들은 마음 둘 곳을 잃은 상태”라며 이런 조언을 내놨다.
그는 “기존 주요 정당이 과감한 혁신을 하고 알을 깨야만 할 것”이라며 “그러지 못한다면 외부 충격이 생길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이어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기존 정치가 잘해주기를 지금으로서는 바란다”라고 했다.
양당의 쇄신이 없다면 ‘제3의 길’을 염두에 두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여기저기 활로가 막혀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제가 약간의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활로를 열어가는 방법에 대해) 국민을 향해 말씀을 드리고, 그것이 여론을 형성한다면 정부에도, 정당에도 일정한 영향을 갖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을 갖는다”라고 덧붙였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 친명계와 비명계 갈등이 재점화한 가운데, 이 전 총리는 조지워싱턴대에서 방문연구원으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오는 6월 귀국을 앞두고 있다. 귀국 후 그의 역할에 자연히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그는 이날 친명계와 비명계 갈등으로 인한 당내 홍역에 대해 “(민주당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할 것으로 본다”라며 “노력의 결과로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귀국 후 자신의 구체적인 역할을 묻는 말에는 “정치가 길을 찾고 국민이 어딘가 마음 둘 곳을 갖게 되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자세한 설명은 아꼈다.
◆“尹정부 외교, 구성의 모순…국민에 낭패감·혼란 줬다”
취임 1년을 맞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간략한 평가도 내놨다. 먼저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두고 “구성의 모순”이라며 “한 부분을 놓고 보면 맞는 것 같은데, 다 합치면 이상해지는 것들이 반복된다”라고 평가했다.
일례로 한·미 정상회담 주요 성과인 핵협의그룹(NCG) 창설이 비핵화 협상 실패 및 북핵 역량 강화 등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면서도 “동시에 긴장이 고조되지 않고 완화되도록 하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최근 불거진 미국의 한국 정부 도청 의혹을 거론, “도청을 미국이 시인하고 사과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괜찮다고, 악의에 의한 도청이 아닐 거라고 두둔하는 건 국민에 상당한 정도의 낭패감을 안겼다”라고 꼬집었다.
이 전 총리는 “(도청이) 잘못됐다는 것, 유감스럽다는 것,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 정도는 표명했어야 국민들이 납득하기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일 외교를 두고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역사의 청산을 요구해온 것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국민에 말하는 것, 그것 또한 국민에 크나큰 혼란을 줬다고 생각한다”라며 “앞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미·중 전략 경쟁이나 국제질서 불안정은 윤석열 정부의 책임이 아니다”라면서도 “그에 어떻게 대처하고 관리하는가는 정부의 책임이다. (윤석열 정부가) 후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그는 “분단국가로서 평화를 확보하는 일, 동맹 국가로 신뢰를 유지하고 공유하는 일, 반도 국가로 인접 대륙 국가와 건설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 통상 국가로 무역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윤석열 정부는) 동맹 국가의 역할만 강화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한다”라며 “불충분한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종합적으로 보고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가져야 한다”라고 했다. ◆“韓美 동맹서 韓 목소리 안 들려…할 말 하는 동맹 돼야”
한편 이 전 총리는 이날 간담회 전에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와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 생존전략-이낙연의 구상’ 출판기념회 겸 대담을 진행했다.
이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안팎의 위험에 직면했다”라며 “불안하게 지켜왔던 평화와 번영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 구도가 점점 더 확연해지고 있다”라며 “냉전 시대에 미·소 대립의 최전방이었던 한반도가 이제는 미·중 경쟁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과거 한국이 한·미 협력과 한·중 협력의 과실을 동시에 향유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미·중 전략 경쟁으로 더는 그러지 못할 상황이 됐다며 “지금까지 한국의 결정 방식이 허물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미·중 전략 경쟁이 신냉전으로 치닫지 않기를 바란다”라며 “다른 나라에 양자택일을 광범위하게 요구하는 상황으로 치닫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북한의 핵 능력 역시 견제 받지 않은 채 강화되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이 전 총리는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20번이나 말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한·미·일 협력의 강화는 필요하다”라면서도 “그러나 그것은 북·중·러 연대의 강화를 부르며, 한반도의 긴장을 높일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한·미·일 협력의 강화와 함께 한반도 긴장의 완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북 대화, 남·북 대화와 안정적 한·중 관계의 확보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은 동맹 중시를 말하지만, 이는 미국우선주의에 밀리곤 한다”라며 “한국은 전기자동차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반도체에서 한국은 미국과 협력하지만, 중국 수출의 대폭적 감소에 부딪혔다”라고도 했다.
이 전 총리는 이날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공조 강화에 집중한다. 그것도 필요하다”라면서도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한국도 일본도 중국과 안정적·건설적 관계를 확보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한·미·일 모두의 숙제”라며 “동시에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해야 하는 중국의 의무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이 한·미 동맹을 유지하려는 한국의 의지를 신뢰하면서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경제 등 분야에서 중국과 건설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도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이와 관련, 이날 대담에서는 한·미 동맹 관계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얼마나 커졌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이 전 총리는 이에 “지금은 커진 게 아니라 안 들리지 않는가”라고 반문,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미국도 할 말을 하는 동맹을 원한다고 생각한다”라며 “미국의 파트너인 동맹국의 지도자가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파트너로서의 가치가 커질 것이다. 미국은 그런 지도자를 원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文정부 대북정책 결과 백지처럼 여기는 것 옳지 않아”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이어지지 않은 점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정권이 바뀌어도 대북 정책의 골간은 바뀌지 않게 할 뭔가를 만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며 “정권에 따라 정책이 동전 뒤집기처럼 엎치락뒤치락 한다면 남북관계에 축적이 생길 수 없고, 북한 입장에서는 상대를 신뢰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전 정부의 대북 대화를 거론, “그걸 모두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건 더 허무한 결과”라며 “지금 정부가 전 정부의 남북관계 결과를 부정하고 백지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했다.
북한을 향해서는 “긴장이 고조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의 북한 정찰위성 ‘파괴 조치 준비 명령’에는 “막아야 할 정도의 정찰위성이라면 주권국가로서 충분히 조치를 취할 수 있다”라는 시각을 보였다.
그는 이날 문재인 정부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태도에 대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면서도 “미국 등 국제사회가 말하는 인권은 서방적 가치 기준에 의한 인권인 경우가 많다”라고 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의 경우 생존권이 가장 기본적 인권일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미국 등 국제사회와 한국 정부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면, 그걸 메우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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